절기가 절묘하다. 처서를 지나며 기세 좋던 더위를 손쉽게 밀어내고 기척도 없이 선선함을 우리 곁으로 바짝 당겨 놓았다.
아들 등교를 위해 방에 깨우러 들어갔다. 이불은 덮는 게 아니다. 꿈 놀이터에서 필요한 놀이도구일 뿐이다. 껍질을 벗은 바나나의속살 같은 배를 훤히 드러내고 깊이 잠들어있다. 가만히 아들 옆으로 누웠다. 머리 위로 여러 채 지어진 새집을 긁기로 빗질하듯 반복해 쓸어준다. 점점 내 품으로 파고든다.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일어나라고 귀에다 속삭인다. 세상만큼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는듯하다 바로 덮는다. 여러 번 반복한다. 서서히 꿈에서 성공적으로 탈출을 한다.
등교하는 평일 아침은 항상 분주하다. 아들의 늦어지는 기상 시간. 굼벵이 같은 밥상머리의 손놀림, 옷 입고 가방을 둘러메기까지 양반 놀이를 하듯 느긋하다. 그에 반해 나는 애가 탄다. 그러나 집 밖을 나서면 상황은 역전된다. 차에 올라탄 나는 최대한 안전 운전을 한다. 그만큼 뒷좌석에 앉은 아들은 조급해진다. 등교 시간이 다가올수록 재촉의 강도는 강해진다. 지각은 아니다. 좀 더 이르게 학교에 도착하고 싶은 아들의 두근 반 새근 반하는 마음이 나를 재촉한다. 그러다 점점 답답해하며 가슴을 두드리는 고릴라가 되는 아들이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혈액이 과하게 몰리게 둔다. 스스로 참을 인을 입술로 새기는 거다.
이날은 전날 출장으로 출근이 늦은 남편과 함께 차에 올랐다. 남편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평소보다 아들의 등교 시간은 당겨졌다. 이른 등교에도 잔뜩 들떠 뒷자리에서 “매일 아빠랑 함께 가고 싶어요” 하며 기분 좋게 조잘조잘한다.
출근 시간과 맞물린 남편의 직장 근처는 많은 차로 복잡했다. 꿈쩍 않는 차들을 보며 점점 아들의 머리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듯 착각하게 했다. 복잡한 도로 위만큼 아들 마음도 한계를 넘어 복잡해지고 있다. 차에서 먼저 내린 아빠를 향해 인사까지는 괜찮았다. 그곳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거리는 3Km 정도다. 그러나 반복해 멈추다, 달리다 하는 차 안의 공기는 3t 같은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길 위 신호등까지찐득하게도 우리를 붙든다. 끝내 학교 앞에서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린다. 재미있게 보내라는 내 인사도 바람에 쉽게 날려버렸다. 아들을 빤히 쳐다봤다. 나를 무시하기 위해 숙인 고개 밑으로 보이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있다. 황당하다. 평소보다 등교 시간이 10분이나 빨리 당겨졌는데,..
천천히 차를 몰아 등교하는 아들 뒤를 따랐지만 끝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문으로 숨어 버렸다. 그 순간 섭섭함을 넘어 가슴 저 밑에서 울컥 화가 올라와 운전대를 꽉 잡았다.
부지불식간 얼마 전 아들과 함께 본 <한산>의 대사가 생각났다.
‘이 싸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물음에 나는 나에게 답해본다.
‘내 마음의 의와 불의의 싸움이지!’
<한산>를 보며 내 마음으로 가장 무겁게 들어온 대사였다.
갑자기 ‘픽~’ 헛웃음이 새어 나오며 거짓말처럼 화는 자취를 감추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유독 예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혼자 심각한 나에게 가을 닮은 하늘이 ‘별것 아니다.’ 라며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