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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Aug 16. 2022

어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그때를 살아 본 나는 꼰대가 된다.

올여름 유난히 습하고 더운 날이다. 평소에 자주 찾던 도서관은 무더위를 식혀주는 여름 피서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여름방학이라 다채로운 공연과 볼거리가 준비된 도서관이 정말 마음에 쏙 든다.


천장에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작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던 정숙이라는 푯말은 절대 가볍지 않은 무게로 나를 쉽게 통제했던 어릴 적 도서관이  생각난다. 그때와 지금의 도서관은 사뭇 다르다.

아들이 특히 좋아해 자주 찾는 도서관은 3층 규모의 신개념 복합 독서문화공간이다.

1층은 영. 유아의 도서와 동화방, 웹툰방, 힐링방 등이 있는 테마별 체험공간이다. 2층은 공연을 위한 무대와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가 있다. 특히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다락방 시설이 있는 복합 독서문화공간으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곳이다. 3층은 대부분 학습공간인 테라스형 열람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 도서관은 책 읽고, 학습하는 수준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읽기를 넘어 상상하고, 다양한 학습으로 꿈을 실현시킬 미리 보기 같은 곳이다. 그만큼 분위기는 정적인 것을 넘어 동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이 도서관을 좋아한다. 책의 첫인상을 학습에서 놀거리, 즐길거리로 인식하길 희망하는 마음에서 일거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아들이 어릴 때부터 자주 찾던 육아 장소였다.


최근 수도권으로 집중된 폭우로 피해가 많아 안타까운 마음과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너무 다른 날씨에 놀랍기도 하다.  이곳은 비가 내릴 듯 말 듯 종일 하늘은 험상궂은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이다, 그나마 공기 중 과한 습도로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이날도 어김없이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에 잠깐 숨 고르기를 했다.  불빛만 보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나 역시 더위를 피해 대형 에어컨 가까이로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 탓인지 평소보다 에어컨의 성능을 최대치로 올려놓고 있어 빙하도 얼릴 정도다. 우습게도 한여름의 추위를 피해 3층의 학습공간으로 이동했다. 다시 자리 잡은 곳에서 책을 펼친다. 평일 대비 많은 이용자들 덕에 도서관은 소란스럽다. 아이들의 소란은 잠깐, 잠깐의 소란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날의 소란은 지속적이고 꽤 긴 시간이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른의 무례함에 낮 뜨겁고, 화가 날 때가 있다. 이날이 딱! 그날이다. 삶의 기준점을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서 살짝 벗어났을 때 모른 척하거나 눈감아 줄 때가 많다. 같은 어른으로 서 누군가를 제재하는 게 불편해 모른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날 도서관은 교원의 연수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2층의 공연을 위한 무대에서 단체로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영어교사 연수라는 글귀가 보인다. 소란의 원인이라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나는 책 읽기에 집중했다. 잠시 뒤 소란이 3층으로 옮겨 왔다. 2층에서 단체 사진을 찍던 젊은 선생님들의 무리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날 그들젊음을 개인적으로 나름 포장하면 자유롭다. 포장하지 않으면 개념 없다.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이곳 도서관은 14만 권 이상의 장서가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처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은 "우와~" 하며 첫눈에 장서의 마력에 빠져든다. 3층까지 높이 쏟아 있는 책장을 바라보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핸드폰은 갤러리를 채워간다. 이해한다.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게 무리 지어 쉽게 접하기 힘든 모습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갤러리 용량을 줄이고 있다. 딱! 여기까지다. 내가 이해라는 관용으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말이다.

장서를 배경으로 사진 찍으며 하나둘 서로가 원하는 포즈를 이야기한다. 소곤거림이 아니라 일반 카페서 친구들과 왁자지껄한 소리로 소란을 만들었다. 키득, 키득 웃으며 서로 어떤 포즈가 좋겠다며 의견 제시도 자연스럽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소란을 퍼트린다. 주변의 책 읽거나 학습하는 사람의 배려는 전혀 없다.


아이들은 아직 자기 조절 능력이나 자기 통제능력이 어른에 비해 미숙하다. 이곳은 꺄르륵 웃거나 뛰어다니 며 큰 소리로 엄마나 친구를 찾는 어린아이들이 많다. 당연 소란스럽다. 그러나 보호자의 통제가 금방 소란을 잠재우는 작은 해프닝일 뿐이다. 이용자들 대부분은 이런 모습으로 눈살 찌푸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웃음이 넘치고 지친 육아에 잠시의 쉼이 찾아들듯, 우리 모두의 삶이 위로받는 함께하는 도서관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그들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얼마나 가겠나 싶어 못 본 척 눈 감았지만 점점 소란의 강도가 강해졌다.  '공공장소에서 스스로 통제못하면서, 도대체 누굴 가르친다는 말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했다.

10여분을 훌쩍 넘도록 그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달았다. 더 이상 눈감기에 같은 어른으로 서 용납되지 않았다. 이럴 때 '꼰대'라는 단어가  나를 주춤하게 했다. 그러나 마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들의 소란을 잠재울 꼰대가 필요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무리에 "저기요! 여기가 도서관인 거 모르시나요?" 말을 건넸다.

순간 뭐라는 거야! 하는 눈빛으로 자신이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하듯 다시 묻는다.

"예?"

"여기 도서관이라고요."

그제야 알아듣고 살짝 민망해하며 언제 우리가 시끄러웠어요! 하듯 정적이 빠르게 순간 찾아들었다.


우리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생각보다 많은 규제를 아이들에게만 엄격하게 들이대는지 모르겠다.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그들도 각자의 교실에서 아이들을 통제할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인 나이만 어른인 그들이 과연 누군가를 통제하고 규제할 명분이 어디에 존재할까!

오히려 자기 통제 능력이 미흡한 아이들에게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하지, 그들에겐 너그러움 보다 꼰대가 필요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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