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질이 두려운 아이
과거의 어린 나를 다독여본다.
올해는 유독 우울의 군더더기가 풍성한 추석을 지나온다. 하교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교문 앞에 서 있다. 항상 함께 다니는 친구와 교문으로 나오며 함박웃음으로 내 품에 폭 들어와 안기며 친구랑 놀고 싶다고 한다. 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승낙을 하고 차로 걸어가는 중이다.
“나 추석에 용돈 30만 원이나 모았다.”
아들이 친구에게 노래하듯 자랑질을 읊었다.
“엄마, 그중에 1만 원만 써도 돼요?”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가을 하늘을 닮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허락을 구한다. 순간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내 얼굴로 앉았다 사라진다.
어릴 적 나는 자랑질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내 영혼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빨간 도깨비를 부르는 의식 같았다.
미닫이문을 열면 단조로운 흑백의 세계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점점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은 금세 자리 잡았다. 우리 집도 발맞추듯 변화에 동참했다. “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알록달록한 세상을 펼쳤다. 아홉 살 내 마음으로도 다양한 물감이 번지듯 색이 입혀졌다. 그렇게 동네에서 다섯 손가락을 다 접기 전에 13인치 컬러텔레비전이 우리 안방에 보물로 자리 잡았다.
어린 내 기억 속 그날은 잉크를 쏟은 어두운 새벽 같았다. 들일 가는 부모님은 보물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아니면 빼앗길 수도 있다며 우리 남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6살이던 동생은 부모의 말은 귓등으로 흘렸지만 나는 마음에 새겼다. 마당 놀이터에서 흙 놀이, 땅따먹기, 딱지치기 등 다양한 놀이에 푹 빠져있었다.
‘삐거덕’ 힘겨운 소리를 뱉는 파란 칠이 벗겨진 대문을 열고 낯선 어른들이 들어왔다. 놀란 동생과 나는 놀이를 멈추고 그들을 올려다봤다.
“부모님 안 계시니?”
낯선 어른이 물어왔다.
“네. 없어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나는 대답했다.
“그래, 혹시 너희들 집에 컬러텔레비전 있니?”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생은 부모님의 당부 말은 온데간데없이 자랑질에 신이 났다.
“네. 우리 집에 엄청 좋은 컬러텔레비전 있어요.”
“그래. 어디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니.”
순간 내 귓전으로 부모님의 ‘보여주면 안 된다.’ ‘보물 빼앗긴다.’ 말이 시끄러운 벌이 되어 윙윙거렸다.
툭! 나타난 낯선 어른은 우리 집 보물을 빼앗는 빨간 도깨비로 변했다.
두려움에 영혼을 내준 나는 동생을 제지하지도, ‘없다.’ 말도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내가 주춤주춤 하는 사이 동생은 빨간 도깨비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우리 집 보물인 컬러텔레비전을 확인했다. 부모님이 돌아오실 시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왔던 낡은 대문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들이 내 시야를 이탈하는 순간 두려움의 올가미가 나를 꽁꽁 묶어왔다. 나를 점점 더 어둡고 축축한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부모님 말씀을 귓등으로 흘린 동생이 미웠다.
얼마 후 들일을 끝낸 부모님이 얼굴 가득 지친 기색을 묻히고 집에 왔다. 그 모습을 보자 신신당부했던 보물을 지키지 못한 나를 혼낼 것 같았다. 겁이 눈물을 데려 왔다.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부모님은 당황해했다. 동생에게 대충 이야기를 듣고 우선 보물을 숨겼다. 빨간 도깨비인 그들이 다시 집에 왔을 때는 동생이 자랑질했던 물건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참을 부모님과 대거리하다 끝내 빈손으로 돌아갔다.
나는 꽤 시간이 지나서야 낯선 그들은 우리 집 보물을 뺏으러 온 빨간 도깨비가 아니란 걸 알았다. 당시 집마다 시청료를 걷으러 다니는 사람일 뿐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겁을 먹고 그치지 않고 울고 있는 나를 유난스럽다며 그냥 두셨다. 그때 별일 아니라며 나를 다독였다면. 무서운 도깨비에게서 꺼내 주셨다면. 어린 내가 두려움에 마음을 내줄 일도 없었을 테다.
꽤 긴 과거를 지나며 그때의 무서움은 그곳에 두고 왔다 생각했다. 아들이 친구에게 자랑질하는 모습에 쉽게 소환될 줄은 몰랐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와 당혹스럽다. 어린아이가 새로운 것을 자랑질하는 것은 아이만의 특권이다. 동생과 아들도 그렇다.
어른이 된 나는 아직도 자랑질의 두려움에 자유롭지 않은가 보다. 아들의 행동에 가을 햇살 같은 미소가 지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왠지 내가 안쓰럽다. 별것 아니다. 두려울 일 없다. 며 스스로 토닥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