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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Dec 05. 2022

'호수의 일'을 읽고...

나는 항상 억울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억울하다. 살아오는 동안 크든 작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넘어질 뻔할 때마다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억울함이 위세를 알려왔다. 처음엔 작은 미세먼지 같던 것이 찐득한 마음과 동맹을 맺어 덩치를 키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돌부리의 크기는 내 억울함의 크기와 항상 등치를 이뤘다. 폐지를 고물상에 팔 때 무게를 늘리기 위해 폐지 사이사이에 물을 뿌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마음에도 억울한 감정을 누르기 위해 착한 딸, 성실한 학생, 친절한 아내와 며느리, 모성애 과한 엄마라는 찐득하고 습한 기운이 켜켜이 뿌려져 마치 원래 같은 모습인 듯 자라났다. 그렇게 덜러 붙은 감정은 다른 감정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를 쏙 빼닮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뼛속까지도. 하물며 삶의 궤적도 사뭇 다르지 않아 그 또한 억울하다.

엄마는 채 영글지 못한 과실 같았다. 성급한 마음에 냉큼 수확해버려 과즙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열여섯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농사짓는 시골, 홀시아버지와 남편만 있는 단출한 식구에 자신의 존재 가치엔 관심 없는 그들의 군식구가 됐다. 삼 남매의 엄마, 시어른의 수발을 받드는 며느리, 아버지의 아내 노릇뿐이었다. 그에 더해 들로 밭으로 일 다니는 일꾼으로 집안 살림도 책임진 주부로서의 삶이 열여섯 그녀에게는 악몽 같은 삶의 전주곡이 됐다.

그녀는 유독 책 읽기를 좋아했다. 버거운 농사일 틈틈이 책 읽는 시간이 유일한 삶의 존재 이유였다. 자신의 덩치보다 큰 삶의 무게에 지쳐 캄캄하고 깊은 밤의 얼굴을 닮았다. 유일하게 밝은 등이 켜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가 읽은 책 이야기를 나에게 할 때였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기엔 나는 너무 철없는 어린아이였다. 엄마의 책 이야기보다 또래들과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는 시간이 억울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은 몸도 마음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어 다가왔다. 20대에 찾아온 류마티스 관절염이 더 깊고 어두운 구렁으로 빠뜨렸다. 일을 끝낸 매일 밤 고통에 신음하다 겨우겨우 잠이 들었지만, 그도 잠시 길고 깊은 불면의 밤이 따라왔다. 밝은 밤이 길고 깊어질수록 그녀는 점점 더 쇠약해졌고 나의 불안은 깊은 어둠의 얼굴을 한 엄마와 더 닮아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몸도 마음도 병에 내어줘 누구의 아픔도 이해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감정이라 누구도 인정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녀를 닮은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다. 수술과 입원도 여러 차례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병원 출입을 거부했다. 자신의 병에 견주어 내 아픔은 엄살처럼 생각하는 그녀를 이해하며 끌어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나와 그녀 사이에 감정은 틈을 넓혀가고 견고해졌다. 그래서 그녀를 닮았다는 말이 나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됐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녀를 닮아 내 삶에도 햇볕 들지 않은 쿰쿰한 곰팡내가 날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유일하게 그녀를 닮은 것에 감사한 것이 있다. 책 읽기다. 지금도 책을 읽고 있다. 내 앞에는 매운 열기를 입으로 뿜어내며 비빔밥을 먹는 아들도 함께다. 입술에 묻은 고추장을 소매로 쓱 닦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나는 곁눈질로 소매에 묻은 붉은 고추장을 봤다. 빨래가 걱정됐다. 그도 잠시 아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비빔밥이 맛있는지 물었다. 꿀맛이라며 얼굴을 깊숙이 그릇에 묻고 먹던 아들이 나를 올려보며 매운맛만큼 화끈한 손가락 하트로 애정을 표현했다. 나는 절로 입가로 미소 짓다 뜬금없이 불쑥 엄마가 생각났다.   

  

지금 밖에는 얇은 겉옷으로 묻어오던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제법 쌀쌀맞게 옷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겨울의 문턱에 있다. 추운 걸 무지도 싫어하는 나는 겨울이 바짝 다가왔음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어린 시절의 십일월은 쌀쌀맞다는 표현은 애교다. 날카롭게 날 선 얼음 칼을 품은 날이었다. 차가운 물에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집 앞 빨래터에서 뻣뻣한 옷감에 묻지도 않는 비누를 칠하며 힘겹게 빨래하던 모습의 엄마가 머릿속을 빠르게 유영하며 지나갔다.      


 서운하다는 건,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에만 생겨나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서운해지기도 하는 일인 모양이다.”라는 호정의 생각이 고스란히 엄마에게 겹쳤다. 내가 엄마를 많이도 좋아하고 사랑했기에 그만큼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의 심연에서 거친 파도가 쳤다. 어린 내가 안타깝다. 어린 엄마가 불쌍했다.   

  

어째서 지나간 일들이 지나가지지 않는 걸까. 어째서 끝난 일들이 끝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나는 지나간 일에 엎어져서 울고 있는 걸까.” 책 속 호정의 모습에 엄마와 내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됐다. 엄마가 되기에 너무 어렸던 그녀와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나였다. 어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을 거다. 어린 엄마 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래전 엄마는 이미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리적으로 과거를 지나왔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정말이지 기억이란 뒤죽박죽인 서랍과 같다. 정작 필요한 건 보이지 않고 쓸데없는 것들만 어지럽다. 그러다 불쑥, 잊고 있던 것들이, 잊고 싶었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가끔은 소중히 간직해 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 기억 속 뒤죽박죽 엉켜있는 엄마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내 안에서 마음껏 세를 불린 억울함이 스스로 감당하기 무섭고 두려워 점점 엄마와의 틈을 넓혀가며 나를 피해자로 포장했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앉은 해맑은 웃음을 가진 아들이 사랑은 억울한 게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아들을 키우며 엄마를 조금씩 용서한다. 나를 이해한다. 서로의 감정에 들러붙어 힘든 시간을 천천히 떼어 본다. 흉터야 남겠지만 엄마를 떠나보낼 힘이 생길 테다. 나를 온전히 바라볼 용기도 생길 테다. 이제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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