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푹 숙인 중년의 사내가 병원 로비에 앉아 있다. 그 옆으로 다가가 살짝 어깨에 손을 올리자 천천히 슬로모션같이 나를 올려다본다.
“어, 왔나. 뭐 하러 왔노?”
“오빠 따뜻한 차라도 한잔할래요?”
대답을 피하며 건넨 나의 첫 한마디다.
병원 내에 있는 커피숍에서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를 주문하고 넋을 놓고 기다리다 주문번호 호출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따뜻한 거 한 잔 마셔요.”
“아, 생각 없는데, 응급실에 있는 네 언니가 걱정되는데….”
손에 지어준 커피는 좀처럼 입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다음 주 아버지 기일에 제사는 못 지내겠다.”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산 사람이 우선이지 죽은 사람이 뭐라고….”
말끝을 흐리며 잠시 정적이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게 싫어 이야기했다.
“이참에 아예 제사를 없애자.”
희미한 미소를 입에 걸고 오빠가 답한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생각 중이다.”
올해 나는 자주 찾는 도서관의 홍보 서포터즈 활동을 시작했다. 이날은 8개월의 활동 기간을 마무리하며 평가 시간을 도서관에서 가졌다. 나름 재미있고 활동적으로 서포터즈에 참여했다. 그 성과로 우수 서포터즈 시상도 받았다. 마냥 기뻤다. 그동안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받는 시간이 됐다. 함께 온 아들은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운영 평가회에 참석해 도서관 관계자분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활동한 회원분들의 이야기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분 좋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아들이 친구 집에서 놀기로 약속한 시각이 되어 차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응, 왜요?”
물었다.
“큰일 났다.”
“예... 뭐가요?”
“**이가 암이라는데….”
말끝을 흐리는 오빠의 목소리는 나와의 사이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병원 갔는데, 초음파하고 ct 촬영했는데, 바로 소견서 써 주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 혹시 아는 사람 중에 대학병원에 있는 사람 없을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오빠의 말과 함께 길을 잃었다.
“음…. 나도 딱히 없는데, 한번 알아볼게요.”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요즘 암은 뭐 완치율이 높으니 별것 아닐 거야.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섭고 어두운 그늘에 갇혀 정신이 방향을 잃지 않게 주문 같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스스로 다독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조카는 2000년 8월생 지금 나이 23살이다. 봄의 새싹이 이제 조금씩 무성 해지는 초입의 여름 윤기 반질반질한 나뭇잎 같은 나이. 그 청년의 몸에는 그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조카가 9살이던 추석날이었다. 나는 오빠가 사는 곳에서 조금 벗어난 타 지역에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첫 조카와 터울이 제법 있는 둘째 조카를 임신 중이었던 올케언니 혼자 음식을 준비하는 건 힘들 것 같아 오빠네로 갔다. 추석 연휴 당직 업무가 있는 일의 특성상 미혼의 여성이 명절에서 조금은 더 자유롭다는 상사분의 생각에 항상 당직 업무가 있었다. 명절 차례는 함께 못하더라도 음식은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당직 업무를 조절해 추석 당일부터 당직을 신청했다. 추석 전날 올케 언니랑 함께 음식을 만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고사리 같은 조카가 손을 보태던 그날이 지금도 어제 일같이 기억에 남아있다.
음식을 끝내고 따뜻한 차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이야기하다 올케언니가 하얀 봉투를 줬다. 열어보니 만 원짜리가 여러 장 들어있다. 그동안 항상 신경 써주는 내가 고맙다며 가는 길에 차비에 보태고 당직 서는 동안 맛난 거라도 먹으라고 했다.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사양했다. 당시 미혼의 나는 직장생활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안정적인 직장인이었다. 그 반면 오빠네는 조금은 빠듯한 생활을 할 때였다. 그래서 마음만 받겠다며 봉투를 돌려줬다. 버스 시간이 제법 남아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모두에게 추석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비 지급을 위해 지갑을 열었는데 두툼하다. 아까 하얀 봉투에 들어있었던 만 원짜리들이 내 지갑으로 언제 들어왔는지 있었다. 바로 전화했다. 전화기 너머 올케언니의 말이 나를 가슴 떨리고 눈물 나게 했다.
“아가씨, **이가 고모는 항상 우리한테 주기만 하고, 일도 많이 하는데, 엄마가 버스비 정도는 줄 수 있잖아.”
그러면서 내 지갑을 찾아 손수 넣어두더라고 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콩닥콩닥 설레고 가슴 저릿한 기쁨이다. 내 첫 조카는 나에게 그런 아이였다. 뭐든 해주고 싶었고, 부족함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매일매일 내 안에서 자라는 시간이었다. 그런 조카에게 한 일보다 하고 싶은 게 많아진 나이, 산 날보다 살날이 많은 나이, 후회보다 도전이 많은 나이인 아이에게 어떻게 이런 가혹한 일이 소리 없이 닥쳐왔나 모르겠다.
이날 두 곳의 병원에서 설마설마했던 일은 더 크고 무겁게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온몸으로 전이가 되었다고 한다. 소화가 잘 안 돼서, 등 쪽이 뻐근하게 아파서, 누구나 쉽게 느끼는 증상으로 찾은 병원에서 아무나 쉽게 들을 수 없는 병명을 귀로 넣은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판다.
자꾸 피곤하다는 말에 게을러서 그렇다. 소화가 안 된다는 말에 안 움직이니 그렇다. 이 모든 것을 몸의 비대한 만큼 더 높고 두꺼운 마음의 장벽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끝끝내 오빠는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림책 <프레드릭>의 주인공 생쥐 프레드릭처럼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고, 온통 잿빛인 겨울을 위해 색깔을 모으고, 기나긴 겨울에 얘깃거리가 동이 나면 사용할 이야기를 모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사랑하는 조카에게 프레드릭 같은 고모고 싶다.
#엄마아빠
#그냥원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