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핑크뚱 Dec 24. 2022

아픔을 삼키는 마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는?


       "순례 씨, 있잖아. 나는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 순례 주택 中


허리가 아팠다. 두 다리의 감각이 흩어져 희미했다. 길을 걸을 때조차 나를 모르는 사람이 "괜찮아요?" 물어 올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미련하게 견뎠다. 진통제로 버텼다. 곧 다가올 중간고사가 걱정되었다. 어떻게 시험을 끝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병원에 갔다. 의사는 별 검사 없이 몇 번의 문진으로 입원부터 하라고 했다. 입원이라는 말이 그동안 어떻게 버텼어요? 위로의 말 같아 끝내 눈물이 되었다.


흔히 허리 디스크라 부르는 요추 추간판 탈출증이라고 했다. 그것도 추간판 사이 디스크가 터져 수술 없이는 치료가 불가하다고 했다. 오빠가 대학병원 여러 곳과 디스크 하면 알아주는 병원에 소견서와 MRI 영상을 들고 돌아다닌 후 얻은 공통의 답이었다. 처음 입원 한 곳에서 수술을 위해 큰 도시의 병원으로 옮겼다. 도착한 병원에서는 혼자 일어서지도 앉을 수도 없는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모르핀 주사하고 검사하세요."

의사의 한 문장이 나의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수술을 위해 4인실에 입원했다. 모두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환자였다. 그중 내가 가장 심각한 수준이었다. 모든 검사는 침대 카에 누워 실려 다니며 했다. 수술을 끝내고 5일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고 했다. 내 활동은 좁은 1인용 침대에 묶여 있었다. 당시는 간병인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만일 있었다 해도 금전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형편이기도 했지만. 당시 보호자인 오빠는 갓 결혼했다. 올케언니와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남자인 오빠가 여성 환자들이 있는 병실에서 간병은 서로가 불편하니, 차선으로 올케언니가 보호자로 병실에 남았다. 아픈 몸만큼 마음도 불편했다. 입원과 수술 후에도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난 잠잘 때엔 앓은 소리를 많이 한다며 병실 사람들은 "아가씨,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속으로 참으면 안 돼요."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응석을 부리지 못했다. 요즘 말로 애어른인 척해야 했다. 경험 없는 내가 마음까지 불편한 상대에게 표현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픔도 고통도 서러움도 스스로 꿀꺽 입으로 삼키기만 했다. 스스로 마음에 두꺼운 벽을 치고 고통에 외로움을 더해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 먹히고 있었다.


조카는 무엇이 자신의 아픔을 밖으로 나오는 걸 막았을까? 요즘은 대부분 조카의 마음을 생각하며 보내는 것 같다. 오빠의 말처럼 권위적인 아버지에 눌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까? 조잘조잘 엄마랑 말하길 좋아하는 조카인데, 엄마에게는 무엇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을까?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자라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조카가 태어나 마냥 기쁘고 좋았던 고모인데,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서글프고 가슴 아프다.

작가의 이전글 어두운 그림자가 덮은 청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