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핑크뚱 Jun 07. 2022

한 시간 슬픔

어떤 모습이든 온전한 너를 사랑해

  하굣길에 마주한 아들은 세상 모든 슬픔을 그러모은 얼굴로 내 품에 폭 안긴다.

 “엄마. 나 비만이래요.”

 순간 몰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항상 한걸음 늦게 따라오는 후회라는 것이 ‘아차’ 싶다. 누구보다 살에 예민한 내가 아들에게 상처되는 눈빛을 보냈다는 자책을 애써 삼킨다.


 모르고 있던 바는 아니지만 낯설다. 아들은 유독 예민했다. 먹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게 없었다. 오히려 주위에서 걱정이 더 많았다. 너무 안 먹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선생님의 걱정이 가득 담긴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나 역시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도하는 마음도 컸다. 그만큼 나처럼 뚱뚱하게 키우기 싫었다. 이런 내 마음이 아들 가방 속에 있을 신체 발달 상황 검사 결과를 외면하고 싶어 했다.


 아들 임신 중에도 먹는 것에 자유롭지 못했다. 이주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는 길이 두려웠다. 저울 위 계속해 바뀌는 앞자리의 높은 숫자만큼 의사 선생님의 핀잔과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해 더 반갑고 귀한 시간이었다. 그녀들은 만나지 못한 기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 둔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놓았다. 나 역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최근 가슴을 큰 바위가 누르고 있는 듯 갑갑하고, 숨쉬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툭 내뱉는다.

 “살쪄서 그래!” 순간 표정 관리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흉한 고랑을 만들어 놓은 살갗, 얼굴 윤곽이 무너진 삼중 턱, 울퉁불퉁 요철이 연속으로 존재하는 배, 무얼 입어도 맵시 없는 몸이다. 어느 순간부터 거울 앞에 서는 게 두렵다. 낯선 모습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에게 비만은 낯설고 따가운 타인의 시선 같다. 이러니 아들만은 이 시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     


 세상은 비만에 대해 너그러움이 부족하다. 예전의 나 역시 그랬다. 전문가란 사람들이 TV에 나와 온갖 질병의 원인이 된다며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넘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깊은 마음에도 상처를 입힌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도 마음의 상처이다. 아들도 벌써 뚱뚱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인식하고 있다. 나 역시 무엇보다 친구들의 놀림의 대상이 될까 두려움이 큰 몫을 차지한다.


 이런 내 마음에도, 눈물 그렁그렁해 품에 안기는 아들 모습은 너무 사랑스럽다.

 집으로 돌아와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아들이다. 어쩜 이리도 쉽게 슬픔을 지우는지 신기하다. 빨갛게 물든 가래떡을 연신 입으로 넣는다. 살짝 매콤한 게 맛있다며 매운 내를 입 밖으로 연신 뿜어내며 엄지 척쯤은 애교다. 이 모습이 이리도 귀엽게 다가올 일인가 싶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세상 모든 슬픔을 그러모았다 떡볶이 하나에 말간 얼굴로 웃는 게 대단하게 여겨진다.

 그래, 슬픔은 잊는 거다. 쉽게 행복으로 갈 수 있는 너를 응원한다.

 어쩜, 세상을 얼룩진 렌즈로 보고 있는 건 나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와 상관없는 타인들의 시선이 무엇이 중요할까 싶다. 엄마만은 어떤 모습이든 너를 응원하고 사랑하면 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사랑도 단수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