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63번.
이사벨 아옌데 작품으로 19세기의 칠레 사회와 황금 열풍이 불던 캘리포니아의 개척 시대를 그려냅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엘리사는 힘겨운 삶의 굴절을 겪어 나가며, 여자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적극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갑니다. LA타임스는 "소설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더할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고 평합니다.
<< 작가의 시선 >> - 미스 로즈 집앞에 버려졌지만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숙녀로 자라난 엘리사는 호아킨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호아킨은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리고, 엘리사는 임신한 몸으로 자루에 담긴 채 호아킨을 찾아 캘리포니아행 배에 숨어 듭니다.
* 누구든지 한 가지씩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법이다. 엘리사 소머스는 자신이 뛰어난 후각과 좋은 기억력, 이 두 가지를 타고났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뛰어난 후각은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좋은 기억력은 그 삶을 기억하는 데,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마치 점성가들이 뭔가를 시적으로 어렴풋하게 떠올리듯 기억해 내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 엘리사는 절친한 친구인 타오 치엔에게, 자신의 삶은 그들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범선 밑바닥과도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우여곡절들이 차곡차곡 쌓이듯, 널찍하고 어둠침침했던 그 범선 밑바닥에도 수많은 짐짝들과 술통들, 자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진실이 뭐가 됐건,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다가온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아갈 앞으로의 삶이었다.
* 그녀의 후각은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맡았던 냄새를 확실하게 기억했다. 그렇지만 그 냄새는 바티스트 마포의 깨끗한 이불 홑청 냄새가 아니라, 남자의 땀 냄새와 담배 냄새로, 시골 염소의 악취보다도 더 고약했다.
* 엘리사 소머스는 펜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냘픈 얼굴을 가진 작고 마른 체구의 어린아이였다. (···)키는 많이 자라지 않았으며 늘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린 인상 덕택에 살아가면서 많은 덕을 보기도 했다.
* 미스 로즈는 (···)엘리사가 자기보다는 더 좋은 운명을 살았으면 하고 바랐다. 내숭도 떨고, 앙탈도 부리고, 함정도 팔 줄 아는 여자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게 순진한 것보다 100배는 더 낫다는 걸 그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 호아킨 안디에타가 일꾼들을 일렬로 세우고 손에서 손으로 짐들을 옮기도록 지휘했다. (···)엘리사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모습을 감추는 평소 그녀의 재주를 발휘해 마음 놓고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두 달 전에 열여섯 살이 되었으며 아직 사랑을 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렇지만 가느다란 손가락이 잉크로 얼룩져 있는 그 의 손을 보고, 심오하면서도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일꾼들에게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리는 걸 듣는 순간, 엘리사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면서 그녀는 숨어 있던 커다란 야자나무 화분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 몇 년 후 엘리사는 술병에 담긴 사람 머리를 앞에 두고, 호아킨 안디에타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으며,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억제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인생을 망가뜨린 그 억제할 수 없었던 열병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는지, 한순간에 되돌아서서 구원받을 수는 없었는지, 수천 번도 넘게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자신의 운명은 처음부터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 전에 천 번도 넘게 태어났으며, 또 앞으로 천 번도 더 넘게 태어나더라도 늘 똑같은 남자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도망을 칠 수가 없었다.
* 엘리사의 영혼이 사랑으로 병들어 어떤 심정일지 미스 로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가 누구일지 즉시 눈치 챘다. (···)로즈는 엘리사에게 성격 좋고 돈 많은 남편을 구해 주려던 본래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하는, 그 운명의 꼬임에 대해 갖가지 대책을 궁리하면서 바느질 방에서 수를 놓으며 화를 삭혔다. 그 사랑이 시작도 하기 전에 싹부터 죽여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비록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엘리사가 원 없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18년 전 테너 가수가 자신에게 남겨 놓았던 그 끝없는 허탈감을 대신 채워 주었으면 하는 은밀한 바람도 있었다.
* 엘리사는 대낮인지 한밤중인지, 화요일인지 금요일인지 분간을 하지 못했으며, 그 청년을 알게 된 이후로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니면 몇 년이 흘렀는지 가늠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끈적끈적해진 것 같았으며,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피멍들로 온몸이 멍든 것 같았다. 엘리사는 사방에서 사랑하는 그 청년을 보았다. (···)엘리사는 그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런 엄청난 사랑이 자기의 혼만 빼놓았을 리 없다고 단순히 생각했던 것이다.
* 호아킨에게는 캘리포니아가 그를 가난에서 건져 주고 어머니를 빈민굴에서 꺼내 폐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금 가루를 들고 제레미 소머스 앞에 당당히 나타나 엘리사에게 청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금······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금이 있는데······.' 금가루가 가득한 자루들과 큼직한 금덩어리들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들, 지폐들이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 (···)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었다. 금에 대한 열병이 그의 혼을 쏙 빼 놓았다.
*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 엘리사는 누군가 자기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 목소리가 자기도 살 수 있다며 권리를 주장하는 뱃속에 있는 아이이 목소리라고 확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희망도 용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 배의 제일 밑바닥 창고, 어둠침침한 그곳, 사방 2미터 정도의 빈 공간에 엘리사가 자리를 잡았다. 돼지우리 같은 그 공간의 벽과 천장은 높이 쌓아 올린 트렁크들과 화물 상자들로 사방이 막혀 있었고, 자루 주머니가 그녀의 침대였고, 초 한 덩어리 외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엘리사는 자루에 담겨, 발파라이소에서 짐짝들과 화물들을 실어 나르는 짐꾼들 중 한 명의 어깨 위에 실려 배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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