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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Sep 20. 2024

사랑했었는지 열정에 휘말렸었는지 - <운명의 딸2>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64번. 









  이 작품에는 타오 치엔이라는 중국인 의사와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히스패닉계와 인디오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다양한 인물들은 '서구-백인-남성'이 주제가 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오던  '제3세계-유색인-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증폭시켜줍니다. 

  <<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시선 >> - 캘리포니아로 가는 배 안에서 아이를 유산한 엘리사는 타오 치엔의 도움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남장을 한 채 호아킨을 찾아 떠난 험란한 여정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리병 안에 담긴 범죄자의 머리'로 호아킨과 만나게 됩니다.

  *  엘리사는 토굴과도 같은 창고 안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깜깜한 곳에 생매장된 기분에다,  짐짝들과 상자들 안에서 풍기는 냄새와 통 속에 저장된 소금에 절인 생선 비린내, 배 밑창에서부터 올라오는 오래된 찌든 냄새 등 갖가지 냄새가 오묘하게 뒤섞여 역겨웠다. 두 눈을 감고 세상을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발달된 후각이 이제는 고문 기구가 되었다. 














 *  타오 치엔은 열이 펄펄 끓는 엘리사의 곁에서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그는 자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몇 가지 되지 않는 도구들을 이용해 다 죽어 가는 그녀를 정성껏 돌보았다.  그는 엘리사가 끈끈한 핏덩어리를 쏟아 놓을 때까지 자신의 오랜 경험과 알 수 없는 연민에 이끌려 그녀를 돌보았다.  타오 치엔은 그 핏덩어리를 등불에 비추어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임신한 지 몇 주나 지나서 모든 게 확실하게 다 달린 태아였다는 걸 알았다. 

  *  타오 치엔은 어떤 방법으로 엘리사를 하선시킬 수 있을지 심란했다.  그렇지만 그녀를 자루에 담아서 배에 태울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같은 방법으로 배에서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옥의 문턱에서 사경을 헤매었던 그 두 달 동안,  엘리사는 몸무게가 많이 줄어들어 얇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야위었다. 그녀에게 큼직한 타오 치엔의 옷을 입혀 놓으니까,  마치 못 먹어서 비쩍 곯은 불쌍한 중국 머슴아이 같았다.

  *   "금을 찾으려고 하지만 도중에 영혼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캣츠 선장이  (···)수도 없이 매번 반복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기들 인생을 확 뒤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벼락부자의 꿈에 눈이 멀어,  아무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엘리사는 동양 남자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았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타오 치엔은 광둥어로 소리 높여 혼잣말을 했다.  그들의 거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끝이 났지만 그런 곳에다가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타오 치엔은 적어도 엘리사가 힘을 추스르고,  다른 칠레 사람들과 연결되거나 아니면 멀리 도망간 애인이 있는 곳을 알아낼 때까지는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그녀는 섹스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밤에 꼭 껴안고 자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욕구는 충분히 채워졌다.  옛 애인을 떠올려 보아도 옛날 창고 안에서의 그 뜨거웠던 흥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에게는 사랑과 욕망이 같은 건지,  그래서 사랑이 없어서 당연히 욕망도 없는 건지,  아니면 오랜 기간을 배에서 앓아서 몸의 뭔가 중요한 부분이 못 쓰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는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들었으며,  그 모자라는 걸 다 배우기에는 인생이 턱없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엘리사가 그동안 모은 돈을 들고서 타오 치엔 앞으로 갔다.  (···)"이 나라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이 나라에서는 보고 배울 게 아직 너무 많아요.  타오,  내가 호아킨을 찾는 동안,  당신은 그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잖아요."













*  1849년 여름과 가을,  그 몇 달 동안 엘리사는  (···)그 넓은 라베타마드레 지역을 돌아다녔다.   (···)호아킨의 길고 긴 침묵은 그의 죽음 또는 그가 나타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두 가지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현실을 놓고,  엘리사는 늘 마음이 무겁고 심란했다.  타오 치엔이 암시했던 것처럼,  만일 그가 진짜 자기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이라면? 

  *  그녀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사방이 꽉 막혀서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을 때,  일기장에다가 이제 자기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캘리포니아의 황야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신이 콘도르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엘리사는 타오의 대답을 미리 알고 있었다.  헛된 사랑을 쫓아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대답일 것이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이제 와서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아킨 안디에타에 대한 기억도 점차 아른해지기 시작했다.  그 탁월한 기억력으로도 확실하게 애인의 모습을 기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아킨 안디에타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지,  진정 그들이 사랑을 하긴 했는지,  창고에서의 밤들이 자기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헛된 망상이 아이라는 걸 확신하기 위해서는 연애편지를 읽어 봐야 했다.  













 *  엘리사는 (···)가끔 타오 치엔 생각을 했으며,  편지도 계속 썼다.  (···)'타오,  나는 이제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했어요.  (···)함께 사랑을 나누던 그 귀중한 시간에 호아킨이 왜 자유에 대해서 나한테 그렇게 열심히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바로 이런 것이었어요······.  바로 이런 벅찬 감정,  이런 광명이었던 거예요.  호아킨과 사랑을 나누던 그 짧은 순간만큼이나 행복한 느낌이에요.  타오,  당신이 그리워요.'

  *  엘리사는 늘 남자 옷을 입고 있었지만,  타오에게 그녀는 완벽한 여자처럼 보였다.  (···)그는 엘리사가 머리를 잘랐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해 보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직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그때도 잘 간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괜한 감상주의에 빠질 것 같아 접어두었던 것이다. 

  *  엘리사 소머스는 지난 2년 동안 타오  치엔의 곁에서 일하며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렀다.  그동안 그녀는 여름마다 호아킨 안디에타를 찾아 나섰다.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여행자들과 합류하여 길을 떠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를 만날 때까지 여행하거나 아니면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 여행할 생각이었지만 넉 달 만에 지치고 병들어서 돌아왔다. 











 *  타오 치엔은 한 줄 한 줄 잘라 내기 쉬운, 수도 없이 가느다란 실가닥들로 자신과 엘리사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실가닥이 모두 얽히고설켜 단단한 동아줄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불과 몇 년 전에 알게 된 사이였지만  (···)서로간에 느끼는 동질감이 인종의 벽도 허물어주었다.  "너는 예쁘장하게 생긴 중국 여자 같아."  하고 타오가 지나가는 말로 엘리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엘리사는  "당신은 잘 생긴 칠레 청년 같아요."하고 즉시 대답했다. 

  *  "엘리사, 평생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그건 황금 열풍만큼이나 미친 짓이야."   (···)어느 날 타오가 말했다.  

  *  엘리사는 자신이 인생의 양 갈래 길에 놓여 있며, 자기가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남은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타오 치엔의 말이 맞았다.  기간을 정해 놓아야만 했다. 이제는 자기가 사랑을 했었는지 단지 열렬한 열정에 휘말렸었는지 제대로 확신할 수도 없었고,   (···)호아킨 안디에타의 품에서 단 한 번도 완벽하게 행복을 느껴 보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그를 사랑할 수 있었는지 수천 번도 더 넘게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다. 












 *  미스 로즈는 엘리사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더 나을 뻔했었다.  엘리사가 그토록 좋아하던 존 삼촌이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이며,  자기와 제레미는 고모와 삼촌이며,  불쌍해서 데려다 기른 고아가 아니라 소머스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알 권리가 있었다.  

  *  엘리사는 4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자신의 몸을 의식하게 되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 1848년 12월 22일에 칠레에서 호아킨 안디에타와 작별한 그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고는 그 남자를 찾겠다는 일념하에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여성성까지도 다 버렸다.   그녀는 자기가 이젠 여자임을 포기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상한 변태가 된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엘리사는 남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버겁기 시작했다.   

  *  검정 천으로 뒤덮인 탁자 위에 유리 항아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머리 앞에 멈춰 섰다.  엘리사는 타오가 자기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져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몇 초 동안 그 머리를 바라보다가 곧 타오 치엔이 끌어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이제 자유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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