뽁뽁이 톡톡톡 터뜨리기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톡 톡 톡 톡 뽁뽁이를 터뜨릴 때 나는 소리이다. 앙증맞게 볼록 솟아있는 동그란 비닐에 손가락을 대고 누르면 톡 소리가 난다. 뽁뽁이가 터질 때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말캉한 촉감 또한 짜릿하다. 거의 다 터뜨린 뽁뽁이를 반으로 접어 발꿈치로 더 눌러보면, 아직 항복하지 않았던 동그라미들이 ‘툭툭’ 비명을 질러댄다. 더 이상 터뜨릴 게 없어진 뽁뽁이는 작게 접혀 재활용함에 버려진다.
내가 주로 접하게 되는 뽁뽁이는 택배 상자에 제품 보호용으로 딸려오는 것들이 전부였다. 배달된 물건의 포장을 풀 때면 뽁뽁이의 동그란 부분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조심 다루었다. 그런 다음 소중하게 빠짐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배송 중에 이미 납작해져서 탱글탱글함이 없어진 경우가 허다했고, 크기도 작아 터뜨리는 맛이 크진 않았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뽁뽁이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홈쇼핑에서 전기레인지를 사게 되었다. 그런데 뽁뽁이가 겹겹으로 두툼하게 싸인 상태로 배달되었다. 뽁뽁이의 모양도 통통하고 상태가 아주 훌륭했다. 레인지보다 뽁뽁이가 더 반가울(?) 정도였다. 뽁뽁이를 두루마리처럼 길게 접어보니 그 양이 제법 많았다. 공짜 선물을 받은 듯 괜히 기분이 좋았다. 레인지 정리를 대충 끝내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리고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뽁뽁이 터뜨리기 삼매경에 빠졌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창밖 풍경과 손끝으로 전해지는 말캉한 촉감, 톡톡톡 터지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졌다. 뽁뽁이가 세 가지 감각으로 나를 충족시키며 무아지경의 세계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얼마 만에 빠져보는 몰입인지…. 한참 동안 반복해서 누르다 보니 머릿속에 거미줄처럼 엉겨 있던 생각들이 투명해져가는 게 느껴졌다. 신경정신과에서 뽁뽁이 터뜨리기를 권유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역시 대단한 놈이었다.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위안과 힐링을 주는 역할까지도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소파 아래로 다 터뜨려진 뽁뽁이가 길게 쌓여갔다. 터뜨려진 부분과 아직 터뜨려지지 않은 부분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터뜨려진 부분은 납작하니 볼품이 없어져 그냥 낡고 후들후들해진 비닐 조각일 뿐이었다. 탱글탱글함이 사라져버린 뽁뽁이를 보자니, 문득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제품을 보호하는 역할을 마친 후에도, 자기 몸이 다 터뜨려진 후에야 버려지는 뽁뽁이는 연탄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평범한 비닐조각으로 변한 뽁뽁이를 재활용함에 넣는데, 짧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연탄이나 뽁뽁이처럼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오롯이 내어준 적이 있었었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100% 온통 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톡톡톡 경쾌한 소리에 빠져 계속 터뜨리다 보니 어느새 손가락에 미세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아릿하고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한꺼번에 다 터뜨려버리기엔 아까워서 뽁뽁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냈다. 사각형 모양으로 잘려진 뽁뽁이를 종이가방에 담아보니 그 양이 제법 됐다. 아껴가며 터뜨리면 제법 오랫동안 터뜨릴 수 있는 양이었다. 나만큼이나 뽁뽁이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1년 먹을 김장김치를 준비한 듯 뿌듯하고 든든하다’는 자랑도 빠뜨리질 않았다.
얼마 후 생일날. 친구가 선물이라며 커다란 꾸러미를 건넸다. 긴 막대 사탕모양의 꾸러미 양쪽 끝이 리본으로 앙증맞게 묶여 있었다. 인형인가? 담요인가? 옷인가? 궁금증에 “뭔데… 뭔데?” 호들갑을 떨며 받아들었다. 이미 크기에서 충분히 맘에 들었다. “비싼 건 아냐,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거로 샀어.”라며 친구가 씩 웃었다. 크기에 비해 가벼웠고 푹신함이 전해져왔지만, 짠순이로 소문난 친구에게서 받는 거라 왠지 기대되었다.
한편으로 친구 얼굴에 스치는 미소와 ‘내가 좋아하는 거’라던 말이 살짝 마음에 걸려왔다. ‘설마? 에이 설마~ 생일선물인 데?’ 자꾸만 생기는 물음표를 꽉꽉 내리누르며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포장지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뽁뽁이 뭉치가 짠하고 얼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