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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Mar 23. 2024

가난을 도둑맞던 시절이 있었다고?

 가난팔이 소녀는 장사 접은 지 오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서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1970년대 박완서 씨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서 나온 구절이다. 이 책은 부자인 남자 주인공이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 여자 주인공과 동거를 하는 내용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그만큼이나 당시 사회의 많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 유통되는 모든 것엔 기한이란 게 존재한다. 말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재 도둑맞은 가난이란 말은 철 지난 말이 되어 폐기절차를 거치고 있다. 




분명 2010년대까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던 거 같은데 약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린 어쩌다 부자가 가난을 체험하러 오던 시대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꾸며내는 시대로 진입하게 된 걸까? 고시원에 살면서 외제차를 타고, 빚을 내고 명품을 사며 고급 음식점에 간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면서. 




가난은 이제 성공하든 실패하든 숨겨야 하는 치부가 돼버렸다. 예전엔 노력 없이 얻은 성과가 그런 취급을 받았었다. 잘난 부모를 둬서 본인의 노력 없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사람은 손가락질받았고, 개천에서 난 용들은 그 끈기 와 노력을 인정받았다. 그 시절에 가난 스토리는 도둑맞을 정도의 값어치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엔 모두 노력 없는 성공, 고생 없는 성과, 굴곡 없는 인생만을 원한다. 그래서 가난한 환경, 고생 끝에 얻은 성과, 굴곡진 인생의 스토리는 팔리지 않는다. 비록 주인공이 그 환경을 딛고 일어섰더라도, 주인공의 외모와 성격에 낀 빈곤의 흔적은 영광의 상처가 아니라 숨겨야 할 흉터일 뿐이다. 




나는 가난을 도둑맞는 게 최악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 빈약한 상상력을 초월한다. 여전히 자전거는 훔쳐가고, 심지어 집중력도 훔쳐가지만 가난은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 가난은 수요 없이 공급만 차고 넘친다. 재고가 쌓여서 떨이로도 안 팔리고, 중고마켓에 헐값에 내놓아도 안 사가고, 무료 나눔으로도 안 가져간다. 



지금은 금수저, 도련님, 부잣집 아가씨, 곱게 자란 티, 사랑받고 자란 티, 이런 것만 불티나게 팔린다. 노력 없이 얻어낸 모든 건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행운의 상징이자 동경 대상이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들의 특징은 구김 없는 성격, 맑은 미소, 고른 치아, 건강한 피부, 윤기 있는 머리 등이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건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나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들이 좋다는 말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 몸과 시간으로 메꿔야만 했던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사랑받고 자랐음에도 사랑받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이를 사랑하더라도 쥐꼬리만 한 월급을 위해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고된 노동 속에 보내야 하는 부모들은 아이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충분한 에너지를 내어줄 수 없다. 그건 아이들의 습관과 얼굴과 성격에 빈곤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면 사랑받고 자랐더라도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지 않는 어른이 된다. 그러니 세상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이가 아니라 여유 있는 부모를 둔 아이를 선호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러니 차라리 가난을 도둑맞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말엔 후천적 노력으로 바뀔 수 있으며 그게 진정한 가치라는 생각이 깃들여 있다. 하지만 현재 지천에 널린 금수저, 도련님, 부잣집 아가씨, 곱게 자란 티, 사랑받고 자란 티 이런 말엔 후천적 변화의 여지가 전혀 깃들여 있지 않다. 심지어 드라마에서도 가진 게 없는 주인공의 고군분투성장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회귀자, 환생자, 힘순찐, 초능력자, 금수저 주인공들의 사이다 액션물이 차지해 버렸다. 이제 가난은 털어내야 할 먼지에 불과하니, 가난팔이 소녀는 장사 접은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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