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반대말을 찾아서
2023년 올해의 책 1위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선정되었다.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의 신작답게 초반 화력부터 장난 아니더니 마지막 마무리까지도 화려했다. 심지어 문학동네는 이번 신간 발간과 더불어 성수동에서 국내 팝업도 진행했으니 말 다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재미있어하진 않지만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소설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곱씹을 거리가 없어서 끝맛이 남지 않는 반면, 하루키의 소설은 곱씹어도 맛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아마 대부분 알고 있다시피, 하루키 작품의 공통 요소는 상실, 사랑, 치유, 삶, 죽음, 성(性)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요소들을 일통 하는 작가의 생각이다. 바로,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는 이 한 문장이야말로 하루키 월드의 토대이자 모든 하루키 작품의 시발점이다. 나 역시 작가와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은 대극점에 놓인 한 쌍의 단어가 아니다.
우선, 삶-죽음이 대극점에 놓여있다고 가정해 보자. 상극에 놓인 단어들은 운명을 같이한다. 그래서 n극 없는 s극은, 오른쪽 없는 왼쪽은, 위가 없는 아래는, 긍정 없는 부정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극점을 이루는 쌍들은 짝이 사라지면 그들 또한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만약 레이 커즈와일의 예측처럼, 우리가 죽음마저 극복하게 된다면 그 극점을 이루던 삶도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는 이유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이지 삶을 잃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니 삶은 죽음이 사라져도 그 운명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삶-죽음은 대극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죽음에 반대에 놓인 말은, 진실로 죽음의 대극에 위치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게 왠지 성(性)일거란 생각이 든다. 죽음이 삶의 일부로서 녹아들어 있으면서 생애의 과정 중 마지막 언저리에 놓여있다면, 성(性) 또한 삶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으면서 생애의 과정 중 시작 언저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생명력의 말소라면 성(性)은 생명력의 태동이기에. 그 생명력을 불러오는 열망, 욕정, 욕망이야말로 진실한 죽음의 대극으로 놓이기에 손색없을 거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르웨이 숲(구. 상실의 시대)> 속 미도리가 그렇게 성에 집착했던 건 아니었을까? 미도리는 할머니부터, 엄마, 아버지를 차례로 죽음으로 보냈기 때문에. 인지하고 의도한 행동은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향기에 놀라서 그 반대 방향으로 향했던 건 아니었을까? 마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연인과 섹스를 했듯이.
당시엔 미도리의 육체적 집착이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돌이켜보니 그건 삶을 지속하기 위해 그녀가 본능적으로 취한 방식이었던 듯싶다. 삶이란 결국 언제나 내일이 올 거라는 거짓 위에서 행해지는 위태로운 줄타기이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 사이가 언제나 연결될 거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당장 오늘 밤에 잠들면 내일 당연히 눈을 뜰 거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모든 삶의 행위는 무의미해지고, 의미를 잃은 시간은 삶으로 뭉쳐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 위엔 불안이 덧입혀지고, 불안에 휘둘리는 사람에겐 삶의 의미는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망각은 축복이다. 우린 망각 덕분에 사는 동안 죽음을 목도하더라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이상 살아가는 것만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을 연속적으로 목도한 미도리는 그 죽음을 잊기 위해 성(性)의 품으로 도망친 것이리라. 좀처럼 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으로. 무수한 죽음과 상실을 겪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