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
옷뿐만 아니라 신념, 도덕, 가치, 성향, 삶에서 두는 우선순위까지도 유행을 탄다. 개인의 마음만큼이나 시대도 변덕스럽다. 결국 시대도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기 때문일까? 2019년, 국내에선 일본 불매운동이 한참이었고 모두 일본과 거리를 두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2024년 지금엔 모두 일본에 더 가까워지려 한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국내 기업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일본 제품을 '단독' 딱지까지 붙여 들여오고 있다. 너 나 할 거 없이 일본 지우기에 열을 올리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이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오늘날엔 신념, 도덕, 가치 모두 상품가치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가치소비도 결국 가치이기 이전에 소비였던 거다.
지금 국내에선 일본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일본풍의 음식점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으며 jpop이 멜론 차트 순위권에 오를 만큼 대중적인 장르로 올라왔다. 국내 ott엔 일본 드라마와 애니가 순위권에 오르는 빈도가 잦아졌고, 합작 드라마를 만들며 서점가엔 일본작가의 책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만 그쳤다면 단순 유행이라 대충 넘어갈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문제는 일본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것들을 점점 더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 일방적 측면을 넘어 양국 문화의 전방위적 교류는 어디서 기인한 걸까? 그저 엔저현상으로 인한 부수효과일 뿐일까? 그건 아닐 듯싶다.
결국 원인은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에게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현재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감정 사이 교집합이 늘어난 게 그 원인이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대표작들의 공통적 분위기가 있다. 예컨대, 미국의 영화나 책은 대체로 과할 정도로 왁자지껄하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데 반해, 일본은 대체로 과할 정도로 자조적이면서 지독할 정도로 처연하다. 그리고 외부의 사건보단 내면으로의 침잠과 변화가 그 줄거리의 주를 이루는 편이다. <인간실격>,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드라이브 마이카>, <걸어도 걸어도>, <토니 타키타니>가 그런 작품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 역시 여기에 속한다.
최근, 소설 <구의 증명>의 역주행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의 최근 인기는 출판업계 종사자들 마저도 미스터리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특정 연예인의 언급이나 영화화/드라마화 소식 없이 소설이 역주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구의 증명>은 과할 정도로 자조적이면서 지독하게 처연한 분위기, 사건사고보단 내면의 침잠과 그에 관한 서술,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는 마지막 결말까지, 일본 소설 구성과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이 역주행이 일본과 한국의 청년 간 심리적 교집합이 증가했다는 실체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양 국 청년들 모두 자조적이고, 처연하고, 우울한 심리의 증가를 겪고 있다고.
이건 달리 말하면 서로의 사회를 마치 거울처럼 비춰보면서 각 국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유용하게 쓸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게 영원하지 않고, 신념과 가치마저 변한다면 아마 이러한 현상마저 언젠간 바뀔 게 분명하다. 변치 않을 것만 같던 반일감정이 겨우 강산이 절반 정도 변하는 시기에 180도 바뀌어 버린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 강산이 또다시 절반 정도 변하는 시기엔 다시 180도 변해서 반일감정에 불이 지펴질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의 우리는 과거 우리가 그랬듯, 한낱 유행에 불과한 신념을 불변의 잣대로 삼아 이리저리 휘두를 테다. 불매운동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돌아올 거다. 그전처럼 일본의 '일'자만 들어가도 불매해서 혼쭐 내는 일을 다시 시작할 거고, 자영업자들은 그렇게 희생될 것이다. 기업들은 또다시 일본과 거리 두기에 들어갈 거고. 어차피 모든 건 유행을 타기 마련이니 현재 청년들의 심리적 우울감 또한 유행까지도 유행처럼 흐르듯 사라졌으면 좋겠다. 고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