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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Apr 06. 2024

선거가 그렇게 중요해?

정치인은 모두 언어의 마술사라지





처음 투표를 했을 때의 설렘은 다 어디 갔는지, 이젠 그저 숙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숙제를 억지로나마 같이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1. 변화의 속도_점진적


나라가 없던 설움을 견디고독재 정권 아래 숨조차 제대로 못 쉬던 시절을 지나서, 어느덧 우린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 사이 자를 들고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경찰들이 사라지고, 두발단속하던 선생님들도 사라졌다. 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복지법안이 증가했다. 물론, 누군가는 레깅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염색과 파마를 한 학생들을 보고 말세야 말세, 라며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국가의 보호가 아닌 위협을 받았던, 혹은 국가마저 없어 외부로부터의 불합리한 갈취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그때의 사람들은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이런 걸 바라고 그 모든 수모를 겪었던 걸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나라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우선 국권의 회복을 바랐을 거고, 독재정부시절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바랐을 테며 치마 길이를 단속당했던 시절의 사람들은 미니스커트를 자유로이 입을 수 있는 날을 바랐을 테다. 항상 사람들이 바라는 건 근시안적인 것들이다. 그 부재나 취약성이 가장 강한 것부터 하나하나 언급하고 고쳐나가다 보면 변한 게 없어 보여도 많은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국권 없던 나라의 국민들은 국권을 되찾고, 선거권을 얻고, 복장의 자유를 쟁취해서 오늘날 우리가 되었다. 한 걸음씩 나아간 결과로써. 





2. 변화의 방향_선택 범위 확장 


지금까지의 변화를 돌이켜보면 국가 성숙도를 가늠하는 지표는 국민들의 선택 범위인 듯싶다. 선택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더 많은 권한이 있다는 것, 더 많은 자원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동시에 우리가 포기할 것들도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선택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선택의 행위가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당의 진보-보수 스펙트럼 역시 넓을수록 좋다. 그런 면에서 우린 조금 더 나아갈 여지가 있다. 우린 흔히 빨간색을 쓰는 당이 보수, 파란색을 쓰는 당이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625 이후 진짜 진보는 국내에서 거의 궤멸되다시피 되었으니 파란색을 쓰는 당은 약한 보수파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며 색으로 치면 빨주노초파에서 파랑이 아니라 연두색 정도일 뿐이다. (근래 정의당이나 진보당도 있긴 하나 존재감이 있는 정당으로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우린 변화의 파도 속에 살다 못해 변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 콘텐츠가 인기를 얻고, 한국의 음식이 주목을 받고, 한국어 노래가 들려온다. 우린 항상 미래를 보고 산다. 앞을 보고 나아간 결과 우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린 정치적인 영역에선 항상 과거에만 머무르는 걸까? 왜 정치적 논쟁은 항상 점진적으로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미래적이고 건강한 논의에서 시작되어 상대 진영을 빨갱이와 매국노라고 헐뜯는 과거의 논쟁으로 귀결 돼버리는 걸까? 





3. 변화의 동력_현재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거지만 나는 지지하는 특정 당이 없다. 단지 부자들의 탈세는 눈감아주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에 직결된 문제에만 엄격해지지 않고, 자신들의 자리보전과 뒷주머니 부풀리는 것에만 전전긍긍하지 않는, 일 잘하는 정치인이 좋다. 



그런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선 주의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상하좌우, 국적불문, 청렴결백 상관없이 모든 정치인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거다. 그들은 모두 현란하게 언어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이끈다. 이걸 조지오웰은 관료적 어법이라 부르고, 스티븐 핑거는 완곡어법이라 부른다. 역사적인 대표 사례로선, 학살을 소동으로 부르는 것, 강제 이주를 인구 이송으로 부르는 것들이 있다. 같은 현상이라도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만 하면 폭력성과 책임성까지 회피할 수 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한 표를 최대한 잘 행사하기 위해선 언어의 포장지에 현혹되는 걸 주의해야 한다. 



나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조금 더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더 자유로운 세상은 설렁 선택하지 않더라도 선택을 고려할 수 있는 그 범위가 늘어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에게 투표의 권리가 있다는 건 권리를 포기할 선택지까지 있음을 내포하고 있고,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선거권을 지키는 것보다 당면의 생계유지가 우선인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러니 그들을 무지한 사람이라 욕하지 않을 거다. 다만 더 나은 미래에서 우린,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건강한 정치적 논쟁을 펼치고 있기를. 생계와 선거권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있기를. 나는 딱 그 정도의 근시안적 바람으로 내 한 표를 던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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