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Apr 27. 2024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달그림자 아래에 잠겨있어서 안 보이는 건가 봐






보통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재테크 수단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게 재개발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믿기 힘들겠지만, 재개발은 내게서 할머니까지 뺏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하셨던 할머니가 정든 동네를 쫓기듯 떠나오고 나서 덜컥 병에 걸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내 기억 속 미아리는 언덕을 따라 지붕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었다. 골목이 좁아서 앞집까지 아이 걸음으로 세 걸음에 갈 수 있는 곳. 그래서 앞 집 수저 개수는 몰라도 그 집의 대소사는 모두 꿰뚫고 있는 곳. 내 또래의 아이보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많은 곳.  무릇 이런 곳엔 어른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빠질 수 없는 법이다. 




호영이네 이모 야채가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 가게의 파는 물건들은 죄다 가게 앞 가판에 나가있고, 안에는 커다랗게 온돌바닥이 있었다. 그 위에 이불이니 베개나 밥솥이니 티브이니 전화기니 없는 게 없었다. 점심 때 되면 하릴없는 어른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곳에 모였다. 우리 할머니는 그곳의 고정 멤버였으니 할머니 껌딱지인 나도 점심 즈음에 출근하듯 가게에 가서 배 깔고 맛난 간식 까먹다가 저녁 밥 할 때즈음 할머니 손 꼭 붙잡고 집에 왔다. 그날의 저녁 메뉴는 야채가게의 재고가 많이 남은 야채들이 결정했다. 




그곳엔 나처럼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살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은 다 육교 건너에 살았다. 그리고 병원이나 약국, 은행 같은 건 다 그 육교 건너에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육교 건너에 볼일이 생길 때면 호영이네 이모 가게에 나를 맡겨두고 갔는데, 내가 혼자 자빠져 코 깨진 날도 하필이면 그날 중 하루였다. 아들내미 부부에게 부탁받아 나를 맡고 있던 할머니의 부탁을 받아 나를 잠시 맡고 있던 호영이 이모로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채가게에 계셨던 어른들은 울며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곤 부산스러워지셨다. 한 분은 급히 우리 할머니한테 전화를 거셨고, 한 분은 휴지를 급히 뽑아 코에서 나오는 피를 닦으셨고, 한 분은 일단 애가 우니 뭐라도 먹이라고 말을 거드셨고, 한 분은 코에서 피가 나는데 뭘 먹이냐고 호통을 치셨고, 호영이 이모는 급히 간장밥을 만들어 수저를 내게 들이미셨다. 나는 울면서 그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나는 아직도 그 밥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혼자 찾아갔던 건. 그 정다웠던 나의 옛 동네를.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건진 몰라도, 나는 모든 것이 바뀐 그곳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떡꼬치를 먹으며 걸었던 구불구불한 길도, 할머니 손 잡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언덕 길도, 큰 길가에 있던 호영이 이모네 야채가게도, 정다웠던 사람들도, 반가움도, 익숙함도. 나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이 들어 노을 질 때까지 낯설어진 동네를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그랬구나. 재개발이 할머니를 죽인 거구나. 




눈길 닿는 곳에 마음까지 내어주고 마는 정 많은 사람이, 갓 스물 지나 시집와서 두 아이를 키워내고, 또 그 아이들의 아이가 태어나 걸음마를 떼고 말을 뗄 때까지 보살폈던, 그 삶의 모든 페이지가 기록되어 있는 그 집과, 그 동네가 한순간 사라졌을 때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일하게 친구라 부를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누구는 시골로 내려가고, 누구는 또 다른 달동네로 이사 가고, 누구는 아들집에 얹혀살 거라면서 뿔뿔이 흩어질 때의 그 마음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모든 게 한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때 그 허망함을 누가 짐작할 수나 있었을까. 그 짧은 시간을 보낸 나조차도 이렇게 가슴 한 구녕이 뻥 뚫린 거 같은데. 할머니 가슴에 난 커다란 빈 구녕에 병 하나 자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나는 비약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쉽게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옮겨가곤 하니까. 할머니는 재개발 때문에 죽은 거다. 나는 정다운 동네를 떠나서 생기를 잃어버린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당신 인생의 모든 흔적과 소소한 낙이 제거되어 버렸던 그 쓸쓸한 표정을. 




이건 그로부터 조금 더 나중에 안 사실인데, 미아리 재개발은 주택 보급 및 도시 청결 사업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면 서울에 부족한 주택을 공급할 수 있으니 그건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낡고 허름한 동네는 발전하는 서울의 도시 경관을 해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그렇게 우리 동네에 담긴 인생의 거취들은 도시의 오물이 되어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다른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위해서. 




언제부터 모든 게 계산기로 두드릴 수 있는 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람들의 손 떼 묻은 것들이 더럽게만 느껴지게 된 걸까? 어쩔 수 없다며 일축해 버리기엔, 가족들이 새로이 지은 아파트를 분양받고 신나 하는 가운데 홀로 웃지 못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재개발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아직도, 심장 한편이 조금은 시큰해져 온다. 그 안에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누군가가 걱정된다. 혹여 너무 많은 걸 잃어 할머니처럼 비어버린 마음에 병 하나 싹 터 버린 건 아닐는지. 




1974년,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왔던 낙원구 행복동은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21세기에도 난쟁이들이 살고 있다. 점점 줄어드는 달동네에서. 사람들은 예전처럼 용역을 부려 난쟁이들을 폭력으로 쫓아내지 않는다. 대신 턱 없이 적은 보상을 주면서 도시환경정비사업이라는 겉멋 든 단어를 내세워 그곳을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제 발로 나가도록. 




할머니는 아직 걸어 다닐 기력이 있을 적에 호영이 이모를 찾아갔었다. 호영이 이모는 이제 종목을 바꾸어 야채가 아니라 생선을 팔고 계셨다. 하지만 여전히 물건은 죄다 바깥에 놓고선 안엔 온돌방을, 이불을, 티브이를 놔두고 계셨다. 아마 예전의 미아리 사랑방을 다시 만들고 싶었던 거였으리라. 하지만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은 예전보다 많지 않은 듯싶었다. 아무도 먹지 않아 누레진 밥을 다 버리고 호영이 이모는 새 밥을 지으셨던 걸 보면. 추억을 찾아간 할머니는 완전히 빛바랜 추억임을 깨닫고선 쓸쓸히 돌아오셨다. 홀로 지난 과거를 붙잡고 있는 옛 친구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들을 무겁게 든 채로. 이제, 호영이 이모가 새로 만들었던 그 생선가게 자리마저도 재개발되었다. 그러니 소식이 끊긴 그분을 찾을 방법이 없다. 나는 호영이 이모가 호영이의 이모셨던 건지, 아니면 성함이 호영이셨던 건지, 그것조차 모르니까. 




원래 처마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지. 그래서 달의 시선도 미치지 못하나 보다. 그들의 하잘 것 없는 소원 하나조차 달 끝자락에 가 닿지 못하고 지워지는 걸 보면. 그들은 달의 그림자에 묻혀 보이지 않는 건가 보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그들은 인생은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소거되나 보다. 나는 달이 유난히 밝게 뜬 날이면 그 그림자를 생각하고, 그 안에 가려진 인생들을 헤아리며 나의 그립고 그리운 옛 동네 미아리를 추억한다. 나 홀로. 




ps. 잘 지내고 계신 거죠. 그러길 항상 바라고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