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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May 04. 2024

봄 vs 가을, 둘은 뭐가 다를까?

4월은 잔인하면 9월은 무정하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T.S 엘리엇 <황무지> 中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4월이 지나고 나니 세상이 완연한 초록으로 가득 찼다. 눈길 닿는 곳 전부에서 푸릇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것만 같은 이때, 일명 '스프링피크'라고 부르는 봄철 자살률 상승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답은 T.S엘리엇의 대표 시 중 하나인 <황무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언 땅에서 싹이 돋는 4월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4월은 지치고 지친 사람들에게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강요하기에.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탈력감과 상관없이 활력 넘치는 세상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4월은 세상과 자신의 유리됨을 숨김없이 보여줘서 잔인하다. 





가을의 풍경

 수확과 풍요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독서의 계절, 옆구리 시린 계절 등. 가을만큼 별명이 많은 달이 또 있을까? 하늘은 높고 음식은 풍요롭지만 어쩐지 옆구리가 시리고 마음에 구멍 든 듯 헛헛한 이유는 가을의 풍경 때문이다. 가을의 풍경 속엔 죽음이 차고 넘치기에. 


 가을의 바닥을 수놓는 낙엽들은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버린 것들이다. 방금까지 살아있던 것들이 바닥을 한 번씩 구를수록 죽어 바스러지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보기 어렵다. 낙엽이 생(生)에서 사(死)의 길로 접어들 때 내는 소리는 임종을 눈앞에 둔 할머니의 피부를 쓰다듬을 때 나던 소리와 닮았다. 그 소리는 그때의 까실한 감촉을 떠올리게 한다. 수확된 들판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린 수확을 풍요로움과 연상시키지만 수확당하는 곡물의 입장에서 그건, 결실의 갈취이자 때 이른 죽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을은 이렇게나 도처에 죽음이 널러있다. 쓸쓸히 버려지는 잎들부터 그렇게 생명을 갈취당해 버린 작물들까지. 우린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 풍경에서 죽음을 느낀다. 그래서 말조차 살이 찌는 풍요로운 계절에 유난스레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거다. 땅은 우리가 나온 곳으로 들어 보내기 위해 끌어당기고, 하늘은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가며, 눈 닿는 모든 곳엔 죽음이 깃든 계절. 바로, 가을이다. 





9월은 가장 무정한 달

  수확은 우리 인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작물과 우리의 공통 목표는 종족의 번식이다. 그들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매와 곡식을 맺는다. 하지만 그렇게 맺은 결실의 산물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이지 못할뿐더러 그 수확의 시기조차 그들이 정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수확은 그들에겐 느닷없이 찾아온 결실의 박탈이자 생명 주기의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 작물을 박탈당했냐는 듯 다시 결실을 맺기 위해 양분을 빨아들이고 햇빛이 있는 곳을 향해 머리를 돌린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늘 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 결실이 곧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으며 때로 외부의 무언가로 인해 빼앗기기도 한다. 그게 인생의 일부일지, 인생의 전부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되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린 살아간다. 전부를 빼앗긴 게 아니라면. 


가장 잔인한 달의 칭호는 4월이 가져갔으니, 9월은 가장 무정한 달이라는 칭호가 걸맞을 듯싶다. 우리의 부조리한 운명을 이토록 고스란히 보여주니까. 


 



봄의 유리와 가을의 동화

  봄과 가을은 이란성쌍둥이 같다. 봄의 17도와 가을의 17도는 같은 기온이라도 느낌이 다르듯이. 봄에 걸리는 계절성 우울증과 가을에 걸리는 계절성 우울증은 느낌이 다르다. 봄의 우울감은 세상과 자신의 불일치에서 온다면 가을의 우울감은 세상과 자신의 일치에서 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상과의 유리감을 느끼느냐, 세상과의 동화감을 느끼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음식, 사랑, 이야기

 유리되서 힘들고, 동화돼도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 답은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린 가을에 유독 허기져선 음식을 먹고, 옆구리가 시려선 연인을 만들고, 헛헛한 마음에 책이나 말동무를 찾아 나서지 않나? 생명은 본디 죽음을 망각해야 살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주변에 죽음이 너무 눈에 띄게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생명에 가까운 것들을 향해 뛰어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을만 되면 음식과 사랑과 이야기를 향해 뛰어간다. 결국, 음식, 사랑, 이야기가 해결책이다. 대단한 방법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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