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May 25. 2024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서워?

말하지 않아도 전달이 되는데  








한창 웹툰작가의 아들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기저에 늘 깔려있던 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마음껏 표출했다. 나는 여기서 그 사건에 대한 잘잘못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장애인을 보는 비장애인 사회의 무정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이를 쉽게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바로 격리시켜야 한다고 외치던 그 무정함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묵혀왔던 아주 개인적인 수치에 대해 먼저 고백해보고자 한다.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반엔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고, 말과 행동이 조금 어눌했다. 하지만 그뿐이었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스치듯 보면 다른 친구들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린, 나는 그 애를 다르게 대했다. 우린, 아니 나는, 때리거나 욕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짓을 했다. 그 애의 몸에 닿기라도 할까 인상을 찌푸리며 피해 가고, 급식 배식을 할 때에도 그 애가 잡았던 부분이 아닌 곳을 잡았다. 그건 온몸으로, '너는 더럽고 불결하고 혐오스러워!'라고 외치는 짓이었다. 말로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 뜻은 다 전달되었을 텐데. 상처라는 걸 모르고 하진 않았던 거 같다. 그때 그 아이의 표정이 아직까지 선명히 기억나니까. 





지적 장애에도 등급이 있는데, 그 아이는 아마 경도 수준의 낮은 등급이었던 거 같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그 애의 어머니께선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섞이며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선 일반초등학교로 보내셨던 거일테다. 잘 부탁한다고 간식까지 돌리면서 말이다. 근데 나는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을까?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랬을까? 못된 아이라서? 그건 아니다. 나는 줄곧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늘 모범생의 위치에 있었으며 욕 한 번 하지 않으며 지내왔으니 말이다. 내가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아이마저도 쉽게 다른 아이에게 잔인하게 굴어 상처 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그 어떤 아이라도 다수 속에 속하면 군중의 일에 얼마나 쉽게 휩쓸려버리는지 말이다.(*폭포효과)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애를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그 애는 내 눈을 피하고 몸을 움츠리고선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그 순간, 내 모든 잘못을 한순간에 깨닫고선 수치심을 느꼈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주변의 말과 행동에 휩쓸리는 게 얼마나 쉬운지를 알았기에 언제나 경각심을 가졌으며 내 곧은 심지를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그 애한테 상처는 이미 다 줘 놓고선,  어쩌면 그 상처 때문에 그 애는 성장이 정체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가해자였던 나는 그 경험에서 배움을 얻었다는 것보다 더 최악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아이에게 훗날이라도 용서를 바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그 애를 '친구'라 지칭할 수 있을까?





교내에서 지적 장애 아동들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아주 빈번하게 말이다. 비단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적 장애인이 가해자인 경우보다 피해자인 경우가 수 배는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기사화되는 건 가해자인 경우뿐이다. 왜냐면 피해자가 장애인인 경우는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뇌는 현저성과 확률적 가능성을 쉽게 혼동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고 들은 횟수가 많을수록 실제 그 사건이 발생한 횟수가 많다고 인지해버린다.(*가용성편향)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장애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조금이라도 지적인 이상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면 괜히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간 적이 있는가?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그런 사람이 앉으면 두려움에 몸이 움츠려들 거나 다른 칸으로 피해 간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인지적 착각이 제대로 뇌리에 박혀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랍인을 보면 다 테러범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과 다른 게 있을까그게 흑인들을 보면 다 범죄자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과 다른 게 있을까그 두려움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대체 언제부터? 





사실 오늘날 지적 장애인을 둘러싼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바로, 낯섦, 무지라는 뿌리에서 말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은 그때 처음으로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를 본 것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과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분리되어 비장애인 친구들로만 구성된 학교에서 교육받고 자라난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래서 우린 최소 9년의 시간 동안 학교에서 배우고서도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무지는 두려움을 쉽게 동반하고, 거기에 종종 '지적 장애인이 가해자인 경우'의 뉴스를 접하다 보면 '지적장애인=위험인물'이라는 도식이 굳어지는 것이다. 





무정하지 않은가. 99명의 피해자가 있어도 1명의 가해자가 있으면999번의 설움을 참아도 1번을 참지 못하면, 바로 격리의 필요성을 외치는 사회가 말이다. 그동안 아주 지지부진하게 조금씩 나아진 지적 장애 아동에 대한 처우를 하나의 이슈만으로 모두 원점으로 되돌려버리려는 그 마음이 말이다. 그 이전에, 지적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부모에게 학교는 왜 믿음을 주지 못하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특수학교가 혐오시설이라면서 설립이 무산되었을 때, 무릎을 꿇고 읍소하던 부모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던 적도 없었다. 지적 장애인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 대해 비난하기 전에, 왜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라던가 사회적 그물망이 아직까지도 형성이 되지 않았는지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덮어놓고 비난만 하는 행위는 마치 그들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알아서 격리되어 살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지 않아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뜻이 전달 됐는데.  





그 애는 결국 특수반으로 갔고, 이후엔 특수학교로 진학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그 아이는 계속 일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의 우리 반은 '우리'반과 그 애로 나뉘었다. 하지만 '우리'반에 나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있고, 그 애도 있었던 거다. 그게 맞았던 건데, 우린 끝까진 '우리'와 '그 애' 사이에 벽을 만들어 분리했고, 밖으로 계속해서 내쫓았다. 나는 아주 경미한 지적 장애를 가진 그 아이마저도 '우리'반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그 잔인함과 무정함을. 그 아이들이 커서 지금의 어른들이 된 거겠지? 똑같이 잔인하고 무정한 그 모습 그대로. 












이전 18화 역사란 대체 뭘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