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학문으로 대할 때 마주하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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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천만 영화인 '서울의 봄'이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5월 18일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나로선 이 타이밍을 놓칠 수 없었다. 막상 역사학과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역사에 몸을 담글 정도로 좋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젠 허울만 남은 기념일을 다시 한번 기념하면서 역사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역사의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역사라는 학문이 가진 질문과 함의에 대해서.
1. 역사의 취사선택 - 역사는 객관적인 서술일까?
역사에서 객관성을 저해하는 건 대부분 자료의 취사선택 과정에서 발생한다. 오늘날 세계는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을 넘어 "제4의 물결" 속에, 아니 이 정도면 변화의 급류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위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나라에서 이젠 시위를 허가받아 경찰의 호위 속에 진행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린 역사가 될 만한 소재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의 범람은 결국 자료 선택 범위의 확장으로, 그리고 선택지의 증가는 오류의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 대답은 '아니요'이다. 이것은 비단 역사라는 학문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과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영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과론적 대답은 아니요, 겠지만 그렇다고 주관성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학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듯 역사도 객관성이라는 불가능한 지향점을 향해 끊임없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검열과 반복검수, 발전하는 여러 기술력을 총동원해서. 마치, 무한급수가 절대 0이 되지 못함에도 0에 수렴되듯이 말이다.
2. 역사를 구성하는 영향력 - 역사는 시대의 얼굴일까, 개인의 얼굴일까?
사건의 원인을 추적해갈 때, 가장 논쟁이 되는 건 '그 속에서 과연 한 개인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가지는가'이다. 아마 다들 한 번쯤 역사를 가지고 '만약-라면'이라는 가정을 세워봤을 거다. 가령, '만약 히틀러가 미술학교에 합격해서 화가가 되었더라면?' 이라던가 '사라예보가 황태자비 암살에 실패했었더라면?'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의 영향력을 높게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가정이다. 과연 지구 절반이 전쟁에 휘말렸던 양차대전이 개인적 인물 하나라는 변수 하나 때문에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역사는 개인의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고 꼭 시대의 얼굴이었던 것도 아니다. 냉전을 부지불식간에 종식시키고, 러시아 연방을 해체한 고르바초프에 대해선 그 개인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급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인과가 없었음에도 그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그 인물이 가진 특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를 이루는 것은 개인이고, 개인은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거다. 이 문제에서 핵심은 이 불가분 관계를 기어코 분리하려 하기보단 이 관계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다.
3. 역사의 중요성 - 나아가기 위해선 기억해야 할까, 잊어야 할까?
어떤 사람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과거는 잊고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망각의 필요성을 어필한다. 매듭짓지 못한 일들은 이제 때를 완전히 놓쳐버렸으니 놓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잊혀가는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게 맞는 걸까?
역사의 중요성은 기억에서 온다. 여기서 기억은 기록과 다른 의미다. 세계는 언제나 기록되고 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이다. 그 무수히 많은 기록 속 우리 인지 속에 놓이면 비로소 기억이 되고, 기억은 역사가 될 수 있다. 나는 나아감에 있어 그런 기억들, 그렇게 걸어온 발자취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망각은 우리 뇌 용량의 한계와 감정과 감각의 피로감을 위한 선물인거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허울 좋은 명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에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하더라도 한 번 굽어진 길은 언제고 우리 앞을 방해할 수 있다. 가장 빠르게 나아가는 과학분야조차도 이전에 이루어졌던 많은 발견들을 발판 삼아 속도를 높인 것이다. 그러니 망각과 잊힘이 나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 말할 수 없다. 역사가 진실로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단단히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건 집착하고 얽매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발점이 된 사건이 무엇인지까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치 돌풍이 불듯 사람들 너나 할 거 없이 역사의 중요성을 외쳤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여러 방송들에선 역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패널로 불러 앉히거나 역사 특집 에피소드를 만들어 방영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간 연예인들은 역사적 사건을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냐 못하냐에 따라 개념연예인과 무개념연예인으로 갈렸다. 당시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었고, 역사 관련 책의 판매율도 증가했고, 역사 관련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도 증가했다. 그러나 그 광풍이 한 번 휩쓸고 난 자리에 남은 건 연예인 뒤에 붙은 무개념 꼬리표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지난한 분쟁뿐이다. 영화 '서울의 봄'의 인기마저도 역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오지 못하고, 한 개인에 대한 증오심만 더 불태우며 사그라들었다. 마치, 역사에 대한 관심마저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