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이름과 그만큼의 상상, 이야기, 생각, 사상, 신념, 이론, 지식이 존재한다. 이미 넘쳐나는 것 같지만 날마다 더해진다.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이고, 따분함과 흥미진진함이며, 정답 혹은 오답이고, 잔잔함이자 전투, 꿈이자 현실이다. 시대를 뛰어넘고 공간을 초월한다. 비움과 채움, 삶의 무게와 하찮음 그리고 존재의 가벼움과 버거움이 모두 허용된다. 사랑과 원망, 위로와 조언, 웃음과 눈물이 있고, 방법 내지는 방식, 배움과 놀이가 제공된다. 여유와 간절함, 차분함과 치열함, 느긋함과 촉박함이 공존 한다. 생의 모든 기운들이 강한 기류처럼 몰려있지만 한 번의 충돌 없이 질서를 유지하는 곳, 도서관은 살아있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책 있는 풍경이 좋은 것이고 도서관 주위를 맴도는 생의 기류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높은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이 주는 안정감과 특유의 책 냄새, 책장 사이를 거닐며 책을 구경하는 일, 그러다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일, 그 책을 들고 창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읽는 일, 책을 읽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 이 모든 것이 좋다. 어쩌다 책꽂이에 책이 부딪히면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도 좋고 얄팍하게 넘어가는 책장소리도 좋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에 내 마음은 탁, 하고 풀어진다. 긴장감이 사라진 마음을 온갖 종류의 생의 기류들이 지나가면서 채운다. 도서관에 숨 쉬고 있는 삶의 여러 가지 모양들을 느끼며 책을 읽다 보면 단순한 책 읽기 이상의 것을 얻을 때도 많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의 책을 움켜쥔 두꺼운 손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기류가, 서두르지 않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온난한 여유로움의 기류가 흐른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책에 눈을 고정한 채 손과 눈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는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만나 기류의 경계 지점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나는 그 희망과 초조함의 경계에서 인생의 강렬함을 보기도 한다. 이 모든 기류들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생생한 삶의 전류가 몸속으로 전달되는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전달은 내 안에서 도서관에 생성되는 기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은 욕구와 책임감을 불러일으켜 나의 내면을 깨우기도 한다. 책과 생의 기류들이 주는 자극에 휩싸인 채 나를 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다니게 내버려두면 도서관에서의 나는 상승기류가 된다.
도서관은 나에게 책 이상의 무엇이다. 나는 책장 속을 걸으며 도서관에서 흐르는 삶의 공기에서 생의 조각들을 모아 나에게 더한다. 이러한 시간들을 차분히 쌓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꿈꾸는 나다움을 발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요즘 도서관 창밖 풍경은 길게 늘어진 초록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록새록 햇빛에 반짝이는 연두였는데 그새 옷을 갈아입었다. 책 한번, 창밖 한번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내 마음에도 초록이 가득 들이차 있는 것 같다. 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뭇잎들이 무겁게 움직인다. 도서관에서 몰려오는 생의 모든 기운들도 강한 생명력으로 내 안에 불어와 나의 마음도 여름을 향해 가는 저 나뭇잎처럼 무게 있게 자라길 바라본다.
*<나의 첫 에세이 출판수업-두번째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