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영 Nov 15. 2021

윤 박사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뉴저지 북부의 웨스트우드 타운에 있는 패스캑 벨리 병원의 응급실 3번 베드에서였다.  보통 응급실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들은 교통사고나 크고 작은 사고로 다쳐서 들어오든지 아니면 심장에 위급 상황이 생긴 경우이고, 혼수상태가 아니라면 잔뜩 긴장한 채 침대에 누워 자신이 받아야 할 응급처치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주위를 살핀다. 그도 아니면 눈을 뜨기도 힘든 고통과 병색이 뚜렷한 얼굴로 치료를 기다리며 표정 없이 누워있다. 

이진구 씨는 그들과 달랐다. 환자용 가운을 입고 침대 중간쯤에 반쯤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아서 응급실에 

견학 온 학생 인양 커튼이 처지지 않은 이웃 침대의 환자들이나 바쁘게 오가는 담당 간호사나 의사들을 흥미로운 듯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환자를 데리고 온 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진구 씨는 나를 보는 순간 내가 같은 얼굴의 동양인이란 이유에서인지 오랫동안 못 만난 옛 친구를 본 듯 환히 웃으

며 벌떡 일어났는데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자신의 다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었었던 모양이었

다. 아이구구, 하며 침대에 다시 주저앉아버리면서도 얼굴 가득히 피어오르는 미소는 거두지 않아 경쾌하고 

밝은 첫인상은, 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사이라기보다는 어느 동창회나 좋은 모임에서 만난 사람인 듯했다. 아

픈 다리의 통증이 그대로 스멀거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앉은 자세 그대로 그는 손을 내밀어 내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이진구라고 합니다. 지난 며칠간 너무 힘들어서 견디다 못해 그냥 응급실로 쳐들어왔어요.” 


그러면서 껄껄 웃는 그는 조금도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껄껄 웃다가 그는 슬그머니 웃음을 거두었는데 얼핏 왼쪽 목덜미에 테니스공과 골프공 중간쯤 되는 크기의 둥글고 단단해 보이는 혹이 눈에 띄었다. 희고 부드러운 피부밑에서 견고하게 불뚝 솟아오른 혹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으며, 불길한 징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오셨으면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는데요?”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이 목의 혹이 안 보이십니까?” 


그는 혹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는 목 대신 상체를 돌려, 혹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아, 혹이로군요.” 


나는 그가 지적한 목의 혹이 혹임이 틀림없음을 바보같이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혹을 똑바로 보기가 민망하고 죄송해서 딴청을 하며 물었다. 


  “그 혹 때문에 응급실에 들어오셨어요?”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또 껄껄, 하고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은 거의 천진하기까지 했는데 세상에 태어날 때도 울기보다는 웃으

며 태어났을 것 같은 데다가 평생 살면서 울어본 일 없이 살았을 듯싶은 자신만만함과 통 큰 기백이 엿보였다. 그리고 나이 때문만이 아닌, 삶의 고달픔이 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 속에 스며들어 있지만, 한때는 아주 잘 나갔음직 한 흔적이, 꾀죄죄한 환자복을 걸치고 헛웃음을 제치는 그에게서 아주 사라지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그를 만나러 오기 전에 보았던 응급실 3번 침대 환자 이진구의 이름 밑에 적혀있던 병명을 생각해 보았

다. 


  'Metastasized Cancer(전이된 암)'


암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단이다.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지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그 병과 분연히 용기 있게 맞서 싸우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듯했다. 

그 정신보다 육체가 약했던 것일까⋯.  슬쩍 림프샘을 타고 올라온 종양이 세상에 광고라도 해야 되겠다는 듯 

불똑 솟아오른 것이다. 


  “담당 의사는 만나 보셨나요?” 


나의 묻는 말에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 앉아 있는지 한 시간이 넘도록 의사 코빼기도 못 봤어요.” 


나는 그 자리를 떠날 핑계를 찾은 것이 반가워, 알아보겠노라고 한 뒤 그의 침대 곁을 떠났다. 



나는 집안에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수위실이나 잡일에 근무하는 일가친척조차 없는, 그러니까 '병원'이라는 

곳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생리적으로 병원 앞을 지날 때면 고개를 돌리고 지나고 싶은(좋아하는 사

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행히 병원에 갈 일을 별로 겪어보지 않고 살아온, 운이 좋은 사람

이다. 그런데 계획에는 물론 없었고 꿈꿔 본 적도 없는 종합병원이라는 곳에서 병원장을 비롯한 의사들, 간호사들은 물론, 기술자들과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하이, 하이’하면서 이 구석, 저 구석, 복도를 휘젓고 다니게 된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처음 인근의 패스캑 벨리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뉴저지에 이사 오던 해니까 30년도 넘었다. 저녁 식사 준비 중 무심결에 돌아가는 믹서기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검지 끄트머리가 조금 잘리며 뼈도 손상을 입은 듯했다. 이웃집 여자의 강력한 주장으로 집에서 가까운 패스캑 벨리 병원 응급실에 끌려간 나는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 서너 시간을 기다린 후 가까스로 의사를 만나게 되었다. 응급실이라는 곳이 워낙 말 그대로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곳이라 손가락을 부여잡고 앉아있는 젊은 여자(그 당시는)는 자꾸만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저녁 먹고 느긋이 나타난 의사는 내 손가락 끝을 살펴보더니 간장 같아 보이는 물약을 사기 그릇에 붓더니 담그고 있으라고 한 뒤 사라져 버렸다. 손가락을 간장 종지에 담그고 하염없이 의사가 돌아와 봐 주기를 기다리던 나는 거의 자정이 가까워서야 하품을 하던 접수계의 여자에게 발견되어 얇은 거즈로 상처를 동여매고 돌아오게 되었다. 내 검지 끝은 보기 흉한 대로 그런대로 잘 아물어 갔지만, 배를 곯은 채로 응급실(응급실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줄곧 대기실에만 있었으니 '대기실에서'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에서의 대여섯 시간은 애초에 멀리하고 싶었던 병원이라는 곳에 혐오감까지 심어 주었다. 나는 그 이후 그 병원 앞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노려보면서, 이를 갈며 지나다녔다. 


그런데 한 10년 전쯤 나는 이를 갈며 지나다니던 병원 응급실에 또다시 실려 오게 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나의 경우에는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마침 한국에서 방문 온 집안 어른들과 일주일 동안 함께할 여행 계획 준비로 신나게 외출을 하였는데 대로 위에서 무엇엔가에 걸려 내 무르팍과 콘크리트 바닥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툭하면 잘 넘어져(찬찬하지 못하고 급해서 그렇다고 항상 핀잔을 들은 것이 사실인 듯했다) 무르팍에 빨간약이 마를 날이 없었는데 이번은 빨간약 정도가 아니었다. 넘어진 것이 아프기보다는 창피한 김에 후딱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내 무르팍보다 세긴 세었던 모양이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슬며시 무릎을 만져보니 손바닥에 예사롭지 않은 날카로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니, 깨진 조각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정신마저 아득해지고 소름이 끼쳐왔다.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엉덩이로 기어가는 나를 발견한 지나던 행인의 도움으로(그 고마운 사람은 나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렇게 응급실로 실려 왔다. 이번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지는 않고 직접 응급실 침대로 옮겨졌다. 왼쪽 다리는 그때부터 무서운 통증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속으로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표현을 눈물을 질금거리며 실감했다. 그때 간호사가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며 커다란 가위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입고 있는 긴 바지를 넓적다리 부근에서 잘라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내가 마침 입고 있던 바지는 산 지 얼마 안 되어 한 번도 빨지 않았던, 즉 새것에 속한다. 나는 간호사를 밀어냈다. 


  “내가 살살 벗을 테니 비켜라.” 


나는 놀라서 입을 벌린 간호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누운 채로, 초인적인 요령으로 긴 바지를 벗어 내렸다. 이렇게 잘리는 운명을 면한 바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옷장 안에 쑤셔 박혀있다가 마땅할 때 꺼내서 요긴하게 입는다. 그런 과정을 지나서 찍힌 엑스레이 사진에는 선명하게 네 조각으로 깨진 무릎이 드러났다. 

 이튿날 나의 깨진 무르팍은 철근과 시멘트로 땜질을 하고 스테이플로 꿰매어지는 수술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다. 무르팍이 깨진 것은 병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이 불편하고 아픈 것에 불과하다. 지금도 내 무릎에는 그때 

넣은 철근 몇 가닥이 남아있어, 손바닥으로 만지면 선명한 감촉이 느껴진다. 


정신만은 멀쩡했던 나는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나이 든 자원봉사자들이 바쁘게 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재활 훈련을 받으러 갈 때 휠체어를 밀어주는 할머니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언젠가는 나도 자원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내 어머니 연세쯤 되어 보이는,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이 할머니는 같은 층, 한 20미터쯤 떨어진 재활원 병동에 휠체어를 탄 나를 밀고 가는데, 나는 송구해서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 은퇴한 지 12년이 되었다는 이 할머니는 일 년 스케줄이 꽉 잡혀 있었다. 뉴저지에서 지내는 여름 동안은 병원과 교회에서 봉사하고, 플로리다에서 지나는 겨울은 그곳 시니어센터(노인센터)에서 봉사하며 틈틈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방문을 받기도 한다. 내가 너무 미안해하니까 그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내 가슴에 데이지가 필 때쯤에는 너희들 젊은이들이(그분 눈에는 내가 젊은이로 보였던 듯싶다. 하긴, 그때 그 할머니보다는 좀 젊었을 때니까.) 병원에서 벌런티어(자원봉사) 하면 돼.” 


나는 그분 가슴에 데이지가 피기 전에 함께 자원봉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내가 병원이라는 곳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다. 그렇게 무릎 부상이 회복되면서 시작된 나의 병원 자원봉사는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틈에 앉아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는 일로 시작되었다. 이 자원봉사자 대기실은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주어질 때까지 연락 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어느 날은 여기저기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로 정신 없이 불러대지만, 어느 날은 온종일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다 점심만 먹고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잡담을 나눈다고는 하지만 남에게는 이야기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으면서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이나 손주들 이야기, 아니면 자신이 기르는 새나 고양이 이야기로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수다가 지겨워져 슬그머니 땡땡이를 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9월 어느 날 아침, 나는 병원 응급실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포근하고 따스한 날이어서 마치 특

별 주문이라도 한 듯 아름다운 그런 날이었다. 


  “응급실에 빨리 와줄 수 있겠니?” 

  “무슨 일인데?” 

  “코리언 보이가 실려 왔는데 네가 필요해.” 


내가 필요한 곳.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 침대에는 한눈에 한국 아이가 분명한 남자아이가 잠자듯 누워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된 몸뚱이가 그곳에 있었다. 담당 간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두 시간 전에 앰뷸런스에 실려 들어왔을 때 이미 호흡이 멈춘 상태였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산소공급을 시도했는지 자그만 몸의 배가 산 같이 불러 있었다. 희고 깨끗한 얼굴 모습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어느 집의 귀한 장난꾸러기 아들이 잠깐 낮잠에 빠진 듯했다. 이 순간, 이 아이의 부모는 그들의 생명 같은 아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차가운 몸이 되어 누워있음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학교 등교 길, 가방을 멘 채 도보 옆 잔디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그 집주인이 발견하여 경찰에 연락해서 병원에 실려 왔다고 한다. 


  “이 아이의 학교에서 부모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 네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오라고 했어.” 


아! 이런 끔찍한 임무가 내게 지워지다니⋯. 그래도 내가 수행해야 할 임무다. 그리고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다. 아침에 이 아홉 살짜리 아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분도 안 되는 거리다) 두 내외는 일터로 출근했다가 아들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징징 울며 누워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부랴부랴 달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미쳐 보지 못한 채 느닷없이 정중하게 응접실로 안내되어 어리둥절한 상태로 상상할 수도 없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들은 영어로 진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꿈속 인양, 헤매듯이 이미 독방에 옮겨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손바닥에 소중히 감싸고 있던 구슬을 놓친 듯 병원 바닥을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하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다가 깜짝 놀란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에 가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TV 앞에 앉아 감자칩을 먹으며 일터에서 돌아올 부모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여기 누워있는 시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듯했다. 


미국은 법적으로 일단 병원 안에서 사망하면 의사의 사망 진단서로 장례 절차를 밟게 되지만 이 아이는 이미 

죽어서 들어왔기 때문에 검시소로 보내져야만 했다. 아이의 시체는 그렇게 부모와 짧은 상봉을 하고 검시소

로 떠나갔다. 병원에서는 부모의 검시소 동행마저도 단호하게 차단했다. 검시가 끝나면 부모에게 연락이 갈 것이라는 통고만 한 채⋯. 

 

사망원인은 부검해 보아야 정확한 진단이 나오겠지만 심장 이상에 의한 발작이라고 했다.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부모에 의하면 태어난 이후 아이들이 해야 할 정기적 

검사는 빠진 적이 없는 데다 지금껏 병 한번 앓은 적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 새 학기가 되면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 축구 선수가 될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몸 안에서 이 아이의 꿈을 짓밟아버리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 이상 나와 그들이 병원에서 할 일은 없었다. 그들은, 혹은 누구든지 이런 갑작스러운 일을 닥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분야의 전문가나 된 듯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서 장의사에 연락하고 함께 묘지를 보러 다녔다. 그들에게는 이 죽은 아들 위로 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날이 어두워진 후 그들의 집에 연락을 받은 친척이 하나둘씩 모이는 것을 보고, 집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나를 따라 나온 아이의 아버지가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희와 귀중한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선생께서 곁에 계셔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너무나 큰 힘이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드라이브 웨이 한 곁에 세워진 농구대 앞에 이제는 주인을 잃은, 마구 벗어던진 아이의 운동화가 각각 한

쪽은 옆으로 비스듬히 그리고 또 한 짝은 뒤집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뛰어노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뒤집힌 운동화로 다가온 그 아이의 죽음이 새삼스럽게 서러워져 나는 오늘 처음 만나 온종일 시간을 함께한 이 사람들이 마치 오랜 지기인 양,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이미 깜깜해진 밤길을 운전하고 돌아오며 나는 차창 밖 먼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뿌듯한 보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며 기도하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하루를 헛되게 살지 않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하루를 살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님, 앞으로 제가 살아가는 날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의 발길이, 생각이, 그리고 마음이 그들 곁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남을 도우면서 사는 축복의 날들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응답 인양, 뜨거운 감동이 젖어 들었다. 나의 기도가 주님 보시기에 기특해서였을까. 한국인들의 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데에 관심을 두게 된 패스켁 벨리병 원에서는 마침 병원에 한국인 이사가 영입

되면서 '한국부'를 신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한인 자원봉사자인 나의 존재가 소개되면서 정식 직원 제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할 일은 병원을 찾는 한인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영어 소통이 안 되는 환자들에게 통역을 해주고, 적합한 의사들을 소개해주고, 병원 청구서나 보험 등,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학군이 좋고 깨끗한  동네라 해도 백인들이 절대다수인 지역에 사는 동양인들은 그 속에 동화되지 못한다. 웬만한 영어를 구사하고 커다란 저택에 번쩍이는 최고급 차를 타고 다녀도 아이들 학교 부모들 모임에 가면 같은 동양인끼리 모여 앉아 신통치도 않은 이슈를 가지고 논쟁하는 백인 엄마들 속에 입 다물고 앉아있다가 온다. 이민 1세라 불리는 나의 세대는 거의 예외가 없다. 나의 콩글리시를 가지고도 통역이 가능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기도의 응답이 아닌가. 하나님이 내 실력을 뻔히 아실 텐데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나는 노상 친구들과 만나 런치 스페셜을 먹으며 수다를 떨며 지내던 생활을 접고, 패스캑 벨리 병원의 풀타임 직원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이를 갈며 지나다니던 병원에 매일 아침 출근해서 직원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를 필요로 하는 장소로 달려가고, 상담에 응하고 지나친 병원 청구서에 아연실색해서 항의 하는 전화들과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다. 


나는 팰리세이드 파크웨이를 운전해 가며 늘 기도하곤 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신실한 성품은 못돼서인지 적당히 나 편한 대로 살면서 필요할 때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하루 지나는 동안 전혀 모르는 병명으로 외국의 사는 환자들 앞에서 알아듣지 못해서 망신당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는 하루에 병명을 10개씩만 외우기로 작정하고 조그만 수첩에 적어서 차에 넣고 다녔다. 계획은 창대했으나 결과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10개는커녕 1개도 제대로 외워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 하는 짓이 신통하다고 여기셨을까, 나만의 비밀스러운 약속의 증거였을까. 생소하기만 한 병원 일이 온종일 다람쥐 같이 돌아다녀도 피곤하기는커녕, 즐겁고 보람을 느끼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나의 콩글리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정확한 의학용어를 기껏 외워서 써먹을 찬스를 노려보기도 하였으나 대개 의사나 간호사들은 나와의 보디 랭기지(?)가 좀 더 속 편한 듯했다. 한국 속담에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세월이 흐르며 나도 조금씩 풍월을 외는 서당 집 개가 되어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병원이라는 곳에 의사와 간호사만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직원들이 구석구석에서 움직이며 병원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병원을 거쳐 가는 많은 환자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좀 이상해서 진찰을 받았더니 암이라고 한다'는 환자들이 놀랄 만큼 많은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런 분들을 위해 '동그라미'라는 암 환자 서포트 그룹을 시작하였다. 두 명의 환자로 시작된 이 모임은 내가 코디네이터로서 한 달에 한 번씩 패스켁 벨리 병원을 떠날 때까지 4년간 계속되었는데, 연간  인원이 200명이나 되었다. 암 환자들은 대개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암 환자들의 형편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하여 의사에게서 얻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와 의학 상식들을 서로의 투병 생활과 그 경험으로 나눌 수 있어서, 멀리 뉴욕에서부터 찾아오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그분들로부터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진구 씨는 입원이 허락되었다. 다음날 4층에 입원한 그를 찾은 내게 그는 노기등등하여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를 꾸짖었다. 


  “응급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넘어서 나타난 의사가 어찌나 건방진지 쫓아내 버렸어요.” 

  “아니, 환자가 의사를 쫓아버리면 어떻게 치료를 받아요?” 

  “그래서 딴 의사를 불러 달랬더니 나를 입원시켜 버렸어요. 그리고 이제껏 약 한 톨, 주사 한 대 놔주는 것은 없고 노상 아까운 피만 뽑아가고 있어요.”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명의라도 검사를 해 보아야 그에 합당한 치료를 할 것이 아닌가. 아마 그는 그의 불안을 내보이기 싫어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후 며칠간 이진구 씨의 엄청나게 부어있는 다리와 목덜미의 혹은 아무 처치도 받지 못한 채, 그는 계속 굶으며 이 검사, 저 검사를 받기 위해 끌려 다녔다. 그동안 나는 많은 이야기를 이 분과 나누게 되었다. 처음 그의 왼쪽 다리가 이유를 모르는 채 붓기 시작했을 때 그는 관절염으로 생각하고 뼈 전문의를 찾아갔다. 뼈 전문의는 그에게 압박붕대를 하고 2주간만 지나면 호전될 것이라고 했다. 이 압박붕대는 그에게 더 큰 고통과 심상치 않은 예감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그래서 내과 의사를 찾아 예약을 했다. 그러다가 소변 보기가 힘들어져 이번에는 비뇨기과를 찾아갔다. 비뇨기과 의사는 그를 암 전문의에게 보냈다. 암 전문의는 외과의에게 보냈다. 이쯤에는 그의 목에 혹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외과의는 그 혹을 보고 수술을 해야 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동안 4개월이 흘렀다. 정확한 근원지는 요도암이었다. 요도에 발생하는 흔치 않은 암으로, 대개 중년 이상의 남성들에게서 흔히 생기는 전립선 질환으로 오인되어 치료 시기를 놓친다고 했다. 그리고 암세포는 임파선을 따라 올라가 목에 혹이 되어 정체를 드러내 놓았고 이미 신장과 장까지 전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론은 아주 고약한 진행 상태의 암 환자인 것이다. 그의 불투명한 미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모든 검사를 끝난 후 병원에서는 더 이상 입원하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일단 퇴원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항암치료를 받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미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아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암세포들을 속수무책 내버려 둘 수는 없으므로 시험 차원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해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퇴원하는 날, 나는 어쩐지 환자의 건강 상태가 불안하면 나도 모르게 종교적인 대화를 무심히 하게 된다. 


  “교회에 다니세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으나 그의 얼굴에 퍼지는 냉소를 보고 찔끔해서, 물은 것을 후회했다. 


  “왜요? 죽을 테니까 천당 갈 준비나 하라는 겁니까?” 


냉소와 함께 날아온 대답은 역시 냉소적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앞으로 못된 병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어딘가에 의지를 하고 함께 싸운다 생각하면 힘이 되고 든든하지 않겠어요?”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용기를 내서 전에 어느 목사님이 암 환자를 문병 와서 그 암 환자에게 하시던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이진구 씨는 피익, 하고 웃었다. 


  “말을 슬쩍 돌려서 하는 재간이 상당한데요, 그런데 내가 교회에 안 나 가도 우리 집 마누라를 비롯해서 캘리포니아에서까지 마흔 명 이상이 내 병 때문에 기도하고 난리가 났어요.” 


하더니 다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예수 안 믿어요” 

  “믿어도 손해 볼 건 없을 텐데 왜 안 믿어요?” 


나의 이해를 따지는 수준 낮은 도전에 그는 갑자기 한숨을 푸욱 내쉬며 씹듯이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가게 될 길인걸요.” 


나는 어쩐지 끈기가 생겼다. 


  “가기야 누구나 다 가지요, 그러나 내가 몇 년간 여기서 일하면서 보니까 항암치료 힘들게 받고 난 후 끄떡없이 수년이 지나도록 정상적으로 사는 분들 많아요. 암이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예요.” 


그건 사실이다. 지금은 다른 주로 이사 간 위암 환자 이기남 씨는 위 수술을 받고 난 후 석 달 동안을 매일 새벽에 와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이어서 항암 주사를 맞은 후 일터로 나갔다. 일터도 사무실에서 편안히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닌 건물 건축 공사장인 것이다. 내가 만났던 사람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그분에게서 나는 끝없는 용기와 가능성을 보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이진구 씨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어쩐지 새로운 생기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를 위로해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알아요. 고마워요.” 


그리고 그는 퇴원을 도우러 온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커다란 혹을 목에 붙인 채 퉁퉁 부운 다리를 끌고⋯⋯. 



그의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여덟 시에 병원에 도착하여 필요한 준비를 끝낸 후 다섯 시간에 걸쳐 두 종류의 항암 주사를 맞으며 그는 TV도 보고 잠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틈틈이 그를 만나면서 마치 오래된 친구 같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그가 살아온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성 품을 가진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그는 그의 살아온 인생을 10년 주기로 나누어 한 편의 시를 썼다. 


 10년 : 어린 시절 6 25 폭격 시 주저앉은 서까래 밑에서 살아남았고 

 20년 : 경복 고교시절 여름방학 때 변산 앞바다에서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 직전 구출되어 

 살아남았고, 

 30년 : 군대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탄약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육군 병원에 후송되어 

 살아남았고, 

 40년 : 현대건설 엔지니어로 사우디 아라비아 현대 지사 파견 시 폭격이 시작된 바그다드에서 미숙한 운전수

 에게 목숨 맡기고 물병 두 개 달랑 들고 달도, 별도 없는 암흑의 사막 길을 20시간 동안 요르단 국경까지 달

 려가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도 탈출하여 살아남았고, 

 50년 : 그 후유증으로 호주 탄광 방문 시, 급성 디스크가 발생, 서울로 후송, 그날 밤 수술 후 살아남았고 

 60년 : 조기 은퇴, 어떻게 보람된 끝을 맺을까 숙고하면서 100년 설계에 도전했는데⋯ “찾아든 암” 


그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의 살아온 세월들을 속편으로 신나게 설명해주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종결은 깊은 고뇌를 떨치지 못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뜬구름이었다. 


  “이제 육십이 되어 편안한 노후를 맞으려고 하는데 이런 못된 암이란 놈이 침범을 했어요, 그렇지만 문제 없어요, 난 이번에도 싸워서 이길 테니까⋯.” 

  “물론이지요.”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어쩐지 자신이 없어서, 이분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이었다. 퇴근을 하면서 보니 메인 로비에 그가 멍하니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이 아직 안 오셨나 봐요?” 

  “마누라가 오늘 일이 늦는다고 해서 버스 스케줄을 알아보고 있어요.” 

  “제가 같은 방향이니까 모셔다 드릴게요.” 


내 옆에 타고 가며 그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내가 병이 꽤나 깊이 들은 모양입니다. 뻔뻔하게 여자분의 차를 처억, 타고 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는 걸 보니⋯. 어쨌든 신세 갚을 날이 오겠지요.” 

  “네. 건강해지셔서 꼭 신세 갚으세요.” 

  “예.” 


그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느닷없이 ‘윤 박사’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윤 박사라니요, 나는 학사도 아닌 터에 의사, 간호사도 아니고, 벼슬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줄반장도 해 본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윤 박사예요?” 

  ”내가 지어냈어요. 박애의 사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 짜, 사 짜. 붙여서 윤 박사예요.” 

  “박애의 사도라고 하니 얼굴이 뜨겁군요, 그런데 모르는 분들이 내가 진짜 박사인 줄 알면 곤란한데요.” 


우리는 같이 하하, 하고 웃었다. 나는 그의 윤 박사 호칭을 접수했다. 아마 그로서는 나를 부르는 마땅한 호칭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한 일이라고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도우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밖에 없는데 박사학위를 주는 하나님은 참으로 너그러우시다. 내가 더 이상 그에게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따금 병원에 들려서 아프고 외로운 환자들을 찾아 기도해주고 가는 '머릿돌 교회'의 이상칠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분에게는 지금 의사보다 목사님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항암 치료받는 날짜와 시간들을 알려주었다. 나는 항암주사를 맞는 그 긴 시간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본다거나, 온갖 상념에 잠겨있을 것이 분명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그 시간들이 아까웠다. 무언가 이 귀중한 시간에 그가 붙잡아야 할 그 어떤 중요한 끄나풀을 그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 데다가 다른 종교를 가까이 접해본 적이 없어서 아는 것이 하나님뿐이다. 그동안 나는 이분과 교회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매사 틀리고 옳은 문제에 있어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엔지니어로서의 까다로운 이성과 명철한 분석을 보아온 나는, 섣불리 믿음에 대한 논 쟁을 하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처음 항암 주사를 맞고 있는 병실에서 이진구 씨를 만나고 온 이 목사는 진땀깨나 흘린 눈치였지만 이분 역시 말랑말랑한 분이 아니다.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분으로 느껴졌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맡겨야지요.” 


비장한 얼굴로 말하는 이 목사의 모습은 신이 나서 전쟁터에 나가는 무사 같았다.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이진구 씨의 항암 치료 한 사이클이 끝났다. 이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그의 목에 생겼던 혹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딴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고약하게 어디에 숨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 흉한 것이 없어진 것만 해도 크게 고무될 일이었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몸속 깊은 곳에서는 암이란 놈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영토를 넓혀가는 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의사나 본인이나 이따금 보는 나까지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는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별 효과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방사선 치료 담당 의사는 그의 안부를 묻는 내게 앞으로 3, 4개월 아니면 2년쯤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답을 한다. 그러면서 또 기적도 있으니 누가 아느냐, 고 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의사들은 환자나 가족들로부터 꼬투리 잡힐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모양이다. 그 정도 대답은 나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방사선 치료도 끝나고 가을이 깊어가면서 그는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하러 오는 일 이외에 다른 치료는 없는 듯했다. 그동안 이 목사는 부지런히 이진구 씨의 집을 방문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데, 역시 공대 출신으로 목사가 된 분이라 일맥상통하는 것이 상호 간에 있어 사이가 아주 좋아졌다(?)고 했다. 이진구 씨는 지팡이에서 워커로, 그리고 휠체어로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달이나 보이지 않아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우려하던 어느 초겨울에 접어든 날이었다. 병원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보았다. 나는 깜짝 놀라 참 비슷한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보니 역시 이진구 씨다.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던 그가 지팡이조차 없이 씩씩하게 혼자서 걸어오는 것이다. 항상 그에게 항암 주사를 놓아주면서 퉁퉁 부은 그의 다리를 마사지해주던 간호사가 내 곁에 있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친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What did you do?)” 


그는 대답 대신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들어 천정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서 하얀 페인트 칠이 입혀진 아무것도 없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다리가 어쩐 일로?(What happened to your legs?)”


간호사가 답답한 듯 다시 물었다. 


  “갓 디드 잇.(GOD DID IT)” 


그는 천정이 아닌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높이 흔들며 복도가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놀라서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 우리들에게 그는 확인하듯 다시 한번 똑같이 외쳤다. 


  “갓 디드 잇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외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는 펑펑 우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끌어안았다. 그가 눈물을 훔치며 그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에게는 진통제도 듣지 않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게다가 더 큰 고통은 배설할 수 없는 고통이다.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변소에 갈 일은 있는데 하체가 너무 부어올라 변기에 앉을 수도 없고 변의는 있는데 배설관이 막혀 배설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변소 한쪽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고 자신도 모르게 애타게 기도하였다. 그래도 매달릴 곳이 하나님이더라는 것이었다. 그 육신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박탈당한 듯한 절대적인 고독감이었다. 배변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은 인간의 권위가 상실된 소외감으로 다가왔다. 그 주말 어김없이 찾아온 이 목사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터질 듯 부은 다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데 손바닥 감촉이 뜨끈뜨끈하게 느껴지는 순간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다. 그날의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눈물 삼키며, 주님의 뜻 따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더 새롭게 살기로 작정했다.” 


다음날, 그를 찾아와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해주고 돌아가는 이 목사를 바래다주고 바람이라도 쐴 겸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앞에 떨어져 있는 지역 신문을 쓰레기통에 넣을 양으로 주워 들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펴 든 신문에서 광고를 보았다. 


  “수술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희소식, 

    Dr. John Runback Holy Name Hospital Interventional Radiologist” 


그리고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것을 읽는 순간 그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했다. 재빨리 집에 들어와 연락을 하니 의사와 직접 통화가 되었다. 다음날로 그 의사와 만날 약속이 되었다. 이때 그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하느님, 정녕 제 기도도 받아 주시나이까?”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에 그 의사의 수술을 받고 잠에서 깨니 내 코끼리 다리 같이 퉁퉁 부어있던 다리가 정상인 내 오른쪽 다리 같이 쫙 빠져 있는 거예요, 나보고 일어나서 걸어 보라길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일어나서 걸으니 옛날처럼 걸어지는 거예요.” 


하면서 그는 오히려 가느다래진 다리를 대견한 듯 쓰다듬었다. 이 말을 하면서 이진구 씨는 줄곧 울었다. 노상 껄껄 웃으며 자신의 아픔을 감추던 그의 강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고 보니 감사함이 눈물로 채워진 것 같았다.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닌 것 알아요. 이 암은 완치된 사례가 없더군요. 결국은 가는 길이지만 단 하루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고 싶었어요. 마음 놓고 고통 없이 앉아서 배설할 수 있는 행복,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은 듯한 그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앞으로는 그 병원에서 계속 치료받게 되어 더 이상 윤 박사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일을 꼭 이야기해주고 싶고, 인사나 하려고 왔지요.” 

  “고맙습니다. 꼭 완치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투병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해지면 꼭 다시 만나서 세상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의 얼굴은 어쩌면 그렇게도 밝고 환할 수가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가슴에 품은 사람의 모습은 육신의 고통마저도 덮는 것일까. 



첫눈이 내리고 곧 녹아버린 12월 초, 그는 내게 한 장의 카드에 시를 써서 보내왔다. 


 “살다 보니까” 


살다 보니까, 싱그럽게 달리다 암암한 터널을 만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안내자와 함께 목사님이 제 곁에서 아침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70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머언데 상처 부위에 얹어 놓으신 기도의 손길은 참으로 뜨거웠습니다. 이 한 몸의 고장은 기계 고장과는 다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장 난 부품은 교환할 수 있는데 100년을 도전해도 아직 갈아 끼울 수가 없다고 역사는 말합니다. 

치료과정에 내려주신 고통이 창조주 뜻인지 몰랐습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절규하다 보니, 교만과 자만으로는 어둠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통 속을 헤매면서 열린 하늘이 하얀 걸 처음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예고도 없이, 늘 갈 길 인도하심을 알았습니다. 이 교만한 자 속죄도 받아 주시며 성경 말씀이 마음에 와닿을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미처 기도하지 못했을 때도 계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결 안 되는 고침도 안내하시고 이제는 지팡이를 팽개치고 스스로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큰 고침을 받고도, 기도와 간구의 그 차이를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기적 기도를 하느냐고, 간구한 나만의 기도가 송구하여, 심심한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살다 보니까, 나 위주로만 내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고 지내 왔습니다. 이제 기도하며 지팡이를 내던지게 하신 분. 내 심장에서 터져 나온 찬송가,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나는 이제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진통제의 혼미한 정신상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승리한 자의 모습을 보았다. 성탄절 다음 주에 이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꼭 알려 드리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어제 주일날 이진구 씨가 세례를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분은 면역체계가 너무 약해져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예배는 못 오시기 때문에 예배 후에 가족들만 모여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요도 부위의 수술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처 받지 않으면서, 이미 전이된 뼈의 항암 치료를 3개월간 받았으나 화창한 지난해 6월 초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가 말했다. 


  “하나님이 저의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특별히 투병의 1년을 주셨습니다. 육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지만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 고통의 1년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 남편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아내가 곁에 있으니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한 종교가 그의 마지막 길을 축복으로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유언대로 그는 다음날 화장되어, 그가 앉아서 바라보던 커다란 나무 밑에 뿌려졌다. 그 시간 나는 짙푸른 하늘에 가느다란 실 연기 같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구름을 향해 손짓하여 작별을 고했다. 그것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작별이 아니고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가 나를 박애의 사도라고 불렀을 때 정말 내가 그의 표현대로 그를 주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쭐하기도 했고 또 즐겁기까지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내가 받은 은혜는 얼마나 뜨거웠던가⋯.

작가의 이전글 돌섬으로 나들이를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