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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Nov 18. 2021

별 이야기

    “집안 형제자매들 가운데 혈액형이 맞는 분이 있나 그것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닥터 박에게서 절박한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경고성이 내포된 위중함은 엿보였다. 그런데 형제자매간 같은 혈액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람.  


  “그게 왜 필요한데요?” 

  “검사 수치가 너무 나빠요.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뇌사에 빠지기도 하는데 간 이식을 생각해야 할지 모릅니다.”  

  “네? 뇌사라고요? 간 이식이요?” 


어리둥절해서 비명을 지르는 나를 보며 조금 안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닥터 박은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꼭 간 이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수치가 계속되면 간 이식을 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그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나는 두 다리에 힘이 빠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이

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며 곁에 놓여있는 소파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간 이식이라니, 일이 어떻게 이 지

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두려움이 스멀스멀 가슴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간 이식을 받다 죽은 사람 이

야기, 간 이식을 못 받아 죽은 사람 이야기⋯. 복강 안에 암적색의 음산한 색을 띠고 길쭉한 고구마 같은 모양새로 자리 잡고 앉아서 인체의 화학 공장이라는 명예스러운 명칭을 가지고 묵묵히 노폐물을 걸러내는 제 할 일을 하다가 틀어져서 손을 놓아버리면 몸뚱이는 그대로 함께 넋을 놓아버리는 간이라는 존재. 나는 할 말을 했으니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듯, 망설이지 않고 묵례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닥터 박을 엉거주춤 일어나 손으로 배웅을 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소파에 깊숙이 파묻듯 온몸을 내맡겼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듯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밀물 같이 몰려드는 수많은 생각들 앞에 두려움이 시커먼 연기처럼 달려들었다. 간 이식, 그리고 뇌사 상태라니. 이따금 신문에서 생소하게 읽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던 그 단어가 내 동생에게 연관 지어져 내게 이렇게 통고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무겁게 짓누르는 두려움이 신선한 산소를 다시는 폐 안에 공급해줄 수 없을 듯 가슴을 압박해 왔다. 무엇이 내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내 잘못이다. 다 내 탓인 것이다. 나 때문에 혜기는 뇌사니, 간 이식의 가능성이니 하는 끔찍한 지경으로 빠지게 되었다. 눈을 감은 내게 방금 본 혜기의 황달로 노래진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눈에 흰자위가 아닌, 검은 눈에 노른자위. 그 노른자위는 정말 달걀 노른자위만큼 노랬다. 바보같이 그 노란 눈자위를 보며 워낙 눈이 이렇게 노랬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던 무지. 그것이 무시무시한 간 이식이니 뇌사니, 하는 단어와 연결되는 황달 증세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앞면 전체가 유리로 된 로비의 넓은 유리창 밖으로 건너다 보이는 맨해튼과 그 앞에 넘실대며 흐르는 허드슨강 물결 위에 군인이 탄 지프 바퀴에 치여 나둥그러지는 순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어린아이의 놀란 눈동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그때도 내 잘못이었다. 아주 오래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고를 친 그날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와 다섯 살 터울인 동생 혜기가 다섯 살일 때였다. 그때 나는 혜기의 손을 잡고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의 국도 극장 앞 차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또 거기가 미국이었다면 그 또래 두 아이가(다섯 살짜리의 손을 잡고 있었던 나도 역시 아이였으니까) 신호등도 없는 바쁜 차도를 건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 둘을 발견한 사람들이 제꺼덕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고, 그대로 경찰차에 실려 가 보호라는 명목으로 갇혀있다가 연락을 받고 출두한 부모에게 인계되고, 부모님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골치 아픈 송사에 휘말리게 되는 형편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까다로운 수사관에게 걸리면 부모 중 한 사람이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갇히는 상태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혼잡한 차도 가운데로는 땡땡이라고 부르던 전차가 양쪽에서 오가고, 짐을 잔뜩 실은 소달구지들과 자전거, 그리고 오토바이와 낡은 도라꾸(트럭)들이 어울려 길을 메우던 때다. 그중에서도 군인들 지프나 이따금 번쩍거리는 데우시나 다꾸시나 하이어들(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이 용케도 그 속을 뚫고 속도를 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건너가는 길이 아닌 곳에서는 감히 길을 건널 엄두도 못 내지만 그때는 길 건너는 사람이 차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차를 피해서 건너가면 되었다. 그리고 달리는 차들은 길 건너는 사람들이 알아서 차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던 시절이다. 왼쪽에서 전차가 천천히 와서 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보호자랍시고 

동생 혜기의 손을 잡고 차들을 헤치며 마침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위해 서 있는 땡땡이 앞을 지나, 오른쪽에서 오는 차를 살피며 길을 건너려는 순간, 지프 한 대가 느닷없이 왼쪽에서 달려든 것이다. 그 눈 깜짝할 사이 나는 지붕이 없는 지프를 운전하는 군인과 그 옆에 번쩍이는 별을 단 모자를 쓴 군인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전쟁 후라 더욱 기세 높던 별자리가 탄 지프는 왼쪽으로 가면서 정차한 땡땡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오른쪽 차선으로 추월하다가 미쳐 길을 건너는 우리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지프를 보는 순간 나는 겁에 질려 혼자 살겠다고 한 걸음 물러서며 혜기의 손을 놓아버렸고 차는 아이를 덮쳐버렸다. 차는 멈추어 섰고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왜 그날 그 시간에 그 길을 아이 둘이서 건너야 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까지 내 마음속을 오간 순간순간의 어린아이다운 상념들은 초등학교 때 무조건 외웠던 구구단만큼이나 명확히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다꾸시와 하이야 모두 과거 택시를 

일컬었던 일본식 말로, 그때 우리 집은 저동에 있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아무리 변한 서울이라고 해도 명동성당과 영락교회의 뾰족탑이 당당하게 높이 서 있는 한, 나는 나의 본적지 주소인 저동 집은 찾을 수 있다. 물론, 지금 그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하고 높은 건물이 육중히 서 있다.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집 앞까지 왔다. 을지로 3가까지는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길모퉁이에 아이스크림 장수가 검은 우산을 펴고 작은 국자로 알루미늄으로 만든 둥그런 통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내어 그 앞에 서 있는 꼬마에게 건네주던 생각은 오래돼서 누레진 사진같이 그러나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은 덥고 목이 말라 그 아이스크림이 무척 먹고 싶었던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을지로 3가에서부터는 뒷골목을 빠져나가면 집이 있는 저동까지 화원시장을 지나야 했다. 시장 안에는 오징어 튀김 행상이 있었다. 이 노란색 옷을 입히고 튀겨낸 오징어는 식초를 탄 간장을 찍어서 먹는데, 배가 고플 때나 아닐 때나 상관없이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최고의 군것질 메뉴이기도 했다. 동생을 교통사고 현장에 내버린 채 도망가면서도 내 눈에 그 오징어가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내는 것은, 아무리 아이지만 그 상태에서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자신의 모자람을 의심해 보곤 하는 대목이다. 다행히 주머니에 돈이 없었던 모양으로 사서 먹은 기억은 없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집에는 왔으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쫓겨날 것이 무서웠다. 동생이 죽었을 것 같아 무섭고 엄마에게 책임 추궁을 받고 매 맞고 쫓겨날 것이 무서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일본식 나무로 담장이 처진 집안 정원에는 때가 한여름이었던 듯 집의 본채와 대문 사이에는 키가 큰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몇 그루의 짙은 잎사귀들을 걸친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나무 담장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을 통해 집 안 동정을 살펴보려고 발뒤꿈치를 올려 몇 번 시도해 보았으나 그 나뭇잎들에 가려 전혀 알아낼 수 없었던 때문이다. 교교한 적막만이 흐르는 집안 어디에선가 희미한 불빛 한 줄기만이 나무숲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는데 대문에 붙어있는 요비링(그때는 초인종을 요비링이라고 했다)을 눌러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무서워서 울고 슬퍼서 울고, 배가 고파져서 울고, 울 이유가 너무나 많았다. 동생은 죽고 나는 집에서 쫓겨나 문밖에 앉아 처량히 울고 있는 불쌍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더 서럽게 울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쓸모없는 아이로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슬픈 만화나 동화책 속에 등장하여 갈 곳도 모르는 채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된 나. 열 살짜리 아이의 가슴에 파고드는 외로움은 이 비극적인 사태보다 더 깊고 아팠다. 나는 그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새벽이면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영락교회의 찬송가 때문에 단잠을 깨어 짜증을 내는 나에게, 엄마는 외롭고 슬플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기도 따위는 워낙에 바쁘신 하나님에게까지 들릴 리가 없다는 어린 마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마 전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쥐약 먹고 죽은 쥐를 혀로 핥아(고양이가 아니니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통으로 끙끙대는 옆에서 밤늦게까지 간절히 강아지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으나 새벽에 결국 죽어 버렸을 때 나는 배신감까지 느꼈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는 안 들어줘!” 


이렇게 선언했을 때 엄마는 놀란 듯 나를 노려보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간절히 성심껏 하는 기도는 들어주신단다.” 


나는 배신감을 느낀 것까지는 감히 말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기도는 역시 어른들의 기도보다 힘이 약한지도 모른다고 단정했었던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밤에 잘 때 무서운 꿈을 잘 꾸었다. 엄마는 내게 잠들기 전에 하나님께 무서운 꿈을 꾸지 않고 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했으나 하나님이 바쁘셔서 내 기도를 들을 시간이 없다는 확신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나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밤하늘에 하나, 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미 별이 되었을 동생의 별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동생의 별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별이 되었으므로 가장 밝게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하나님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매달릴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비옵나니 이 밤 저도 별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혜기 별 옆에 나란히 반짝이는 별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무서울 일도 야단맞을 일도 없는 그런 별이 되고 싶었다. 마음이 편해진 나는 별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며칠 후, 별이 되지 않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혜기는 왼쪽 다리 전체에 깁스하고 어른들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왔다.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여기저기 찰과상은 입었지만, 목숨에는 별 상관이 없어 입원 며칠 만에 퇴원해서 집에 온 것이다. 국도 극장 앞에서 페인트 상을 하던 집안 아저씨가 마침 두 아이가 길을 건너오다 차 사고를 당한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 연락한 후 지프에 태워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백병원 응급실에 데리고 간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날 밤, 병원에 혜기를 입원시키고 집에 돌아온 부모님은 문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든 나를 보는 순간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은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나에게 책임을 물고 야단쳐야 할 일들이 있었던 것은 생각도 나지 않으셨었는지 모른다. 나는 단지 다친 동생 때문에 현장에서 잊혀 길을 헤매다 간신히 집에 돌아온 가엾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길 잃고 헤맨 불쌍한 아이의 흉내만 내면 되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혜기의 깁스한 다리의 발뒤꿈치와 발가락에 뚫어 놓은 구멍에 대고 부채질을 해주어야만 했다. 날씨는 덥고 그 속은 근질거리니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여름 내내 동생의 짜증과 신경질을 고난 받는 죄인처럼 견뎌내야만 했다. 아무도 내 죄를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였음에도 양심은 살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뻘뻘 땀을 흘리며 몇 개의 부채를 결딴내면서, 그 조그맣게 뚫어놓은 구멍을 향해 지치지 않고 부채질을 정성껏 해주였다. 그러나 늦은 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문 앞에서 울다 잠든 채로 발견될 때까지의 그 가슴 아픈 어린아이의, 별이 되고 싶었던 고독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왜 동생에게 닥친 이 끔찍한 상황에서 반세기 전의 그 참담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것인지⋯. 어린 시절에 당했던 그 교통사고의 기억이 거의 없는 듯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다리의 상처 자국의 정체조차 관심이 없는 동생은 이제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뉴욕의 소설가다. 



가을이었다. 


  “언니, 나 이번에 교회에서 가는 파라과이 단기선교팀에 신청했어.”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교 여행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혜기는 미개지(?)인 파라과이의 선교지에서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변비에 대한 우려를 했다. 특히 '화장실 시설이 한국의 50년대의 시골 변소 정도라니 어쩌?' 했다. 평소 변비 증상이 없는 나도 여행 중에는 문제가 예민해지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우려하는 걸 외면하지 못하고 그 고민을 해결해 주려고 나섰다. 어찌 된 셈인지 나는 그런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찾아가서 약을 얻어오고 잘 복용하고 있는지 매일매일 확실히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한달음에 달려간 내게 한의사는 동글동글하게 조제된 환약을 건네주며 그 효능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부터 하루에 열 알씩 먹으면 보름 후에 떠나는 날까지 뱃속을 편하게 만들어 여행 중에 절대로 변비로 고생하지 않게 될 것을 장담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혜기에게 환약을 건네주며 나는 기고만장했다. 


  “이제 네 문제는 깨끗이 해결이다.


그리고는 약을 제대로 안 챙겨 먹을 경우에 당할 고생에 대해 경고하며 매일매일 제대로 약을 먹고 있는지, 여학교 때 학생주임같이 면밀히 점검해 보곤 했다. 그리고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듯한 떨떠름한 대답을 들을 때면 그 약을 챙겨다 준 수고가 얼마나 지대했는가, 를 강조하고 생색을 내서 감히 안 먹고는 못 견디게 닦달을 하곤 했다. '좀 효력을 보는 것 같지 않니?'하고 그 약을 먹은 후의 놀라운 효과를 기대하며 다짐을 받곤 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지낸 후 선교지로 떠날 날이 일주일 남짓하여 비행기 예약을 마친 후부터 혜기는 감기가 든 것 같다며 타이레놀을 먹고 쉬어야겠다고 했다. 그래, 푹 쉬면서 약 제대로 챙겨 먹으면 만사형통이다. 다음날 혜기는 오래전에 해 놓은 골프 약속을 취소할 수가 없어서 나갔는데 너무나 기력이 없어 로열젤리 다섯 알을 먹고 갔는데도 카트에 앉은 채 일어설 기력도 없어 골프채를 휘둘기는커녕 비몽사몽을 헤매며 늘어져 있다가 들어왔다고 전화를 했다. 달려가 보니 얼굴색이 보기 싫게 푸르뎅뎅한 회색빛이 돌았다. 아무리 이상기온으로 춥지 않은 날씨라고는 하지만 3월의 날씨는 아직 차다. 감기 기운이 있는 데다 바람까지 불어 얼굴이 얼었다 녹은 것이 틀림없다고 돌팔이 진단을 해준 뒤, 약 잘 먹고 푹 쉬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주고 돌아왔다⋯. 그날 혜기는 충실하게 조제된 열 알의 한방 변비약과 두 알의 타이레놀과 다섯 알의 로열젤리를 먹고 잠이 들었다. 어쨌든 떠나는 날까지는 건강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환약으로 변비에 대처하고 타이레놀로 감기를 해결하고 어쩐지 기운이 없으니 로열젤리로 기력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들이 내린 완벽하고 철저한 처방이었다⋯. 


다음 날, 전날 내린 처방의 효과가 궁금해서 전화하니 선교지로 보낼 물건들과 짐들을 교회로 미리 가져다주어야겠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 못 일어나겠으니 도와달라는 혜기의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았다. 달려간 내게 문을 열어주는 혜기의 바나나 껍질 같은 노란 안색을 보는 순간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눈자위까지 노랬다. 


  “얼굴색이 좀 노란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진단을 하고 또다시 잔소리 처방을 내렸다. 


  “감기들은 사람이 추운 날씨에 골프를 치고 그러니까 몸이 힘들어서 노란색이 되나 보다. 뭣 좀 기운 나는 거 챙겨 먹어라.” 


그리고 선교지로 보낼 물건들을 챙겨서 나오는데 동생은 말할 기운도 없는 듯 그냥 침대에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노란 얼굴로 파라과이에 갈 수 있을까?” 

  “아직 이틀 남았으니까 괜찮아지겠지. 그래도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못 간다고는 할 수 없잖아. 죽어도 갔다 와야지.” 


힘들여 그 말을 하는 혜기의 목소리는 불안해 보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죽어도 갔다 와야지.” 


힘차게 대답한 나도 불안하기는 했으나 무식하기는 둘이 똑같았다. 죽어도 갔다 온다는 표현은 전혀 온당치 않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죽으면 어떻게 간다는 말인가. 까짓 노란 얼굴은 곧 괜찮아질 것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 얼굴이 노랗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무식하면 사람도 잡는다는 말은 역시 그런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일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황달이라는 의학 용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노란 얼굴이다. 얼굴이 노래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몸속의 독성을 걸러내는 일을 하는 간의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즉 노래진 얼굴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증상이다. 


침낭과 몇 개의 부피 큰 물건들을 교회에 가져다주고 다음 날 혜기에게 전화를 거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야.” 


그렇게 강조한 후 끝까지 변비 환약의 효능만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마지막 점검을 했다. 


  “그리고 내일 떠나는데 변비 문제는 잘 해결될 것 같니? 그리고 얼굴색은 좀 나아졌니?” 

  “모르겠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쥐어짜듯, 꺼질 듯했다. 얼굴색이라는 게 그렇게 제멋대로 노래졌다, 파래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단순한 사실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단기 선교를 떠나는 다음 날 아침, 혜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떠날 준비 다 했니?” 

  “나 오늘 못 떠나게 됐어.” 

  “뭐라고? 그렇게 다 준비해놓고 못 간다면 어쩌니? 침낭이랑 물건 보낸 것은 어쩌라고?” 


딴생각은 없이 마지막 순간에 계획을 변경해 버리는 그 결정이 황당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염려는 이미 비행기 편으로 현지에 부쳐버린 침낭의 행방과 이미 지불한 비행기표 값, 그리고 누가 그 침낭을 챙겨서 다시 가져다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절박한 상태에서 기껏 침낭 걱정을 해야만 했던 것은 대단히 저능하다고 하겠지만 이 침낭을 꽤 비싼 돈을 들여 큰맘 먹고 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침에 내 눈을 보고 애 아빠가 자기 말은 듣지 않을 테니까 내과 의사인 매형을 만나보고 떠나는 결정을 하라는 거야. 그래서 같은 건물에 사는 매형에게 갔더니 나를 보는 순간 입을 딱 벌리면서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한대. 여행 다녀와서 입원하면 안 되냐니까 선교인지 어딘지 가면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대. 본인이 못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동행한 교인들에게 무슨 팔자로 시체를 매고 돌아오게 하느냐는 거야. 그러니 할 말이 없더라고⋯.” 


이 말을 하는 혜기의 목소리는 벌써 중병환자였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얼굴이 노래진 것은 내가 알기도 두어 주일이 넘었다. 간이 안 좋아진 상태가 분명한데 거기다 계속, 한방 변비약은 물론 타이레놀이며 로열젤리, 인삼차 등을 들이켰으니 몸이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래도 남편이 의사인 터에 여태껏 뭐 하다가 막상 떠나는 아침에야 비로소 마누라의 황달로 노래진 얼굴을 보았단 말인가. 새삼 황당하고 기가 차고 원망스러웠다. 하긴, 새벽에 출근하고 어두워 퇴근해서 저녁밥 먹으며 티브이를 보다가 잠자는 나날에서 새삼스레 아내의 눈을 들여다볼 틈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를 맹렬하게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혜기는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선교지 파라과이로 떠나는 대신 뉴욕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함께 선교지로 떠날 예비교육을 받았던 교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떠나는 날 아침 선교 여행을 취소해 버리는 그 심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떠날 수 없는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해 줄 기력조차 없어진 혜기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실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검사에 들어갔다. 피검사에서 나온 빌리루빈(적혈구가 수명을 다하고 파괴되면서 그 속의 헤모글로빈이 대사과정을 통해 생성되는 것으로 헤모글로빈의 노폐물임) 수치와 혈구(SGPT) 수치가 정상보다 100배나 높은 상태라고 했다. 초음파를 찍은 결과를 놓고 몇 사람의 의사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했으나 그 의견이 모이지 않아 MRI 검사와 캣스캔(CAT Scan)까지 모두 거쳐야 했다. 이 모든 검사를 거치는 동안 심상치 않은 검사 결과를 알았음인지 혜기의 남편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땅만 내려다보고 지냈다. 마누라가 그 지경까지 되도록 몰랐다가 떠나는 날 아침에야 잘 다녀오소, 하려고 얼굴을 보는 순간 이크! 이 사람 얼굴이 이게 웬일이야, 했을 것이니 황당하고 미안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특정 수치로 보아 말기 간암인가 하는 견해를 주장하는 의사도 있었으나 초음파 결과에 의하면 암의 특성은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한 MRI 결과 역시 암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암의 징조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행이다, 하고 마음 놓을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에 혜기는 어딘가에 쓴 글에 의사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간암 말기입니다, 하고 통고해 올 것으로 추측했다고 했다. 그럴 때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인가, 하는 표정 관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바쁜 의사들로서야 ‘아! 암입니다’ 하고 암 전문의에게 보내버리면 끝이지만 암이 아니기에 간 전문의들은 외려 머리가 아파졌을 것이다. 소견서에는 유독성으로 추측되는 물질이 유발한 급성 간 질환으로, 간이 그 기능을 상실하여 전혀 할 일을 안 한다고 씌어 있었단다. 그리고 덧붙여 대단히 흥미롭고 우려되는 간 수치이며 간 전문지에 보고해야 할 귀추가 주목되는 케이스라고 했다. 이때쯤에는 황달이 흑달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 환자의 간을 이렇게 농땡이 부리게 했는가. 뉴욕대학병원의 간 전문 의사가 혜기를 앞에 앉혀놓고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 간 전문의와 10분간 상담하기 위해 환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씩 날아올 정도로 유명하다는 이 의사는, 당신의 간이 제 할 일을 안 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환자에게 차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저것 묻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최근에 네가 먹은 음식이나 약을 하나도 빼지 말고 말해보라.” 


특별히 생각나는 음식으로는 생선회, 그리고 약은 로열젤리, 타이레놀. 그리고 한방 변비약... 의사는 무릎을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거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 붙여놓은 커다란 프린트물을 떼어내서 혜기의 눈앞에 펼쳐놓았다. 혜기의 눈에 “치명적”이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드디어 범인을 잡아낸 것이다. 


혜기는 퇴원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체력과 하나님만이 본인의 생사를 가늠하는 것으로서, 병원에 있어 봐야 의사가 따로 해야 할 일도 없고 오히려 쉽게 다른 질환에 걸릴 수가 있기 때문에 집에서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며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고 회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한약은 생명을 살리는 효능을 가진 환자가 있는 반면 독약이 되는 체질의 사람이 있다. 제조해 준 한의사에게 그 성분을 문의하니 대황과 아주까리라고 했다. 딴 한의사에게 알아보니 그 두 성분은 독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아마 제조해준 한의사도 모르는 성분이 반드시 들어있을 것이라는 단언이다. 그날 남편이 잘 다녀오소, 하면서 얼굴도 안 쳐다보고 그냥 파라과이 선교지로 떠나보냈다면 정말 큰일 치를 뻔했을 것이라는 뒷이야기는 그나마 떠나는 날 아침에 얼굴을 봐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인지…. 


그 후 2~3주간 혜기는 생사를 넘나드는 자리에 있었다. 환청과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것이 두려워 침실 베드가 아닌 거실 소파에 누워 있으면서도, 몇 발자국 움직이면 되는 문을 누가 두드려도 열어줄 힘조차 없었다. 비몽사몽을 헤매며 간에서 분해되지 않은 독성이 피부에 끔찍하고 기분 나쁜 가려움으로 나타나, 간에 해를 끼치지 않는 특별히 제조된 과일 주스로 가려움을 해소해야 했는데 거기에는 부작용으로 아마 변비를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문이 씌어 있었다. 변비를 고치려다가 간을 잡아먹고 그 때문에 오는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변비를 유발하는 과일 주스를 마셔야 하는 처지. 이 사람 잡는 환약의 출처를 캐묻는 가족들에게 실제 범인의 신원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혜기는, 그냥 교회의 누군가가 이 약을 챙겨다 주었다고 했나 보다. 혜기의 시어머니가 노발대발해서 내게 따져 물으셨다. 


  “그 으떤 정신 나간 인간이 그런 독약을 갖다 주고 묵으라 캤는지 이모는 누군지 압니까?” 


어떻게 그 정신 나간 인간이 사실인즉 접니다, 하고 실토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랬다면 나는 몇 대 얻어맞을지도 모를 기세였다. 나는 모른다는 시늉으로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또 매달려야 할 곳을 찾아야 했다. 나는 팰리세이드 파크웨이를 오가는 차 속에서 운전대를 잡고 울면서 기도하고 따졌다. 


  “주님. 제가 지금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줄 아시지요? 시침 떼고 있다가 나중에 네 기도가 모자랐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저를 배신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내 잘못인 것은 물론 잘 알지만 용서해 주시는 의미로 혜기를 살려주세요.” 


내 생전 처음으로 죽고 살기로 매달렸다. 그리고 혜기는 살아났다. 뇌사도 슬쩍 비껴가고 간 이식도 지나가고, 서너 달이 지나며 간신히 노란색이 조금씩 사라지고 바람직한(?) 병색 짙은 몰골의 환자가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하던 피검사는 한 주에 두 번으로, 한 번으로, 그리고 석 달이 지나면서는 한 달에 한 번만으로 6개월을 계속했다. 열량 높은 음식만 골라서 먹고 누워 지내다 보니 온몸에 비계가 골고루 자리를 잡았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나 행복하고 바람직한 투정이었다. 간 이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나를 비통하게 하던 의사가 이제는 위험이 지나갔다고 통고하던 날 나는 집으로 운전해 가며 차 속에서 힘차게 감사의 통성기도를 했다. 이번에는 그냥 슬쩍 넘어가 버렸던 오십여 년 전의 감사 기도도 덧붙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두 번씩이나 제 잘못을 지켜주고 살려주신 하나님 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일부러 지은 죄 만이 죄가 아니다. 미련한 것도 죄일 것이라는 뼈아픈 경험도 얻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겼으나 잃은 것도 많았다. 그 이후 혜기의 예민하고 까다로워진 간은 타이레놀은 물론 한잔의 와인에도 심통을 부린다. 그래서 감기가 들어도 타이레놀도 피하고 둘이서 가끔 와인을 홀짝거리며 새로 나온 책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평하던 평화롭고 아늑한 시간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 절체절명의 순간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았다고 믿는다. 별이 되고 싶다는 기도의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동생이 자동차 바퀴 밑에서, 그리고 간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초를 용케도 피해 살아서 이렇게 하하 웃으며 마음으로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나의 은밀한 약속이 지켜진 것임을 나는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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