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아이가 세 살되던 해에는 옆동으로 이사를 했었고,그로부터 5년 후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무렵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옮겨왔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날즈음 "엄마, 집에 가기 싫어. 집이 싫어. 우리 집은 왜 놀이터가 없고 여기는 있어? 여기가 좋아."내게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며칠이 지나 어느 날 밤31살 용(남편)과 나는 큰 결심을 한다.
당시 우리 살던 집은 아파트 놀이터가 멀리 떨어진 주택가였다.
가까운 곳에 눈을 씻고 둘러봐도 아이가 놀만한 곳이라던가 놀이터라고는 볼 수가 없었던 동네였으니 , 그저 아이는 미끄럼틀이 실컷 타고 싶었을 테고 맘껏 뛰어놀고 싶었을 테지. 그때는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열세 살이 된 지금도 아이는 그저 운동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뛰놀기 좋아하는 몹시 활동적인 동네서 알아주는 외향형의 어린이다)
어쨌든 우리는 생애 첫 주택자금 대출이라는 감사한 정책의 지원을 받아 이사를 할 수 있었다.
15층의 집 베란다에 아이의 놀이방을 만들어 줬다. 아이는 여름엔 더운 줄을 몰랐고 , 겨울에는 추운 줄을 모르며 눈을 떠으레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도로 위 지나가는 차들을 호기심 가득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놀곤 했다.
지금까지 자동차디자이너가 되기를 줄기차게 꿈꾸는 아이의 희망은 이미 그때 부터였을런지도,
아무튼 그런 아이를 위해서 나는 겨울엔 담요와 핫팩을 잔뜩 깔아줬고, 여름엔 비록 아이 발목까지 잠길 물이었지만 자그마한 놀이튜브에 나름 작은 풀장도 만들어 주고 그곳에 밥상을 차려 먹여가며 놀아 주기도 했다.
아이는 그렇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났고 어느새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너무 자유롭게 길러냈던 것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영혼까지도 몹시 자유로운 초등학교1학년이었다. 친구들과의 다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잦았던 것은 기본이었고, 예민하고 다소 까칠했던 유아기 때 성향이 입학 후에는 본격적으로 두드러져 학부모가 된 나는 등교를 시켜 놓고 긴장하며 지내는 날이 반복되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전글 가을밤에 든 생각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그 무렵 전후로 아이는 기함을 할 정도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켰었다. 이를테면 15층 베란다에서 1층의 놀이터로 장난감을 떨어트렸던 일이라든가,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을 위해 세 번 집을 옮겼다지,
15층을 벗어나 정원이 야트막하게 보이는저층으로 이사를 가보자. 그곳에서 아이에게 매일 자연을 가까이 보여주며 안정된 정서를 느끼게 해 주면 좋을 것 같아,
여간해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를 성가셔하고 움직임 없이 다소 둔한 나지만 일단 뭐든 결심을 하면 거침이 없어지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맥락 없는 생각이겠지만 , 아이의 정서를 위한다는 이유로 이사를 하겠다. 이러한내 의지만은 이미 충분했다. 그렇게 같은 아파트 게다가바로 옆동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우리 집 넓은 창 바깥으로 야트막하게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해가 뜨고 지고,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 따라 지루할 틈이 없이 다채로웠다.
그것을 아이에게 더 가까이 보여주기 위해 베란다에 폴딩도어를 설치하고 테이블을 두기도 했다.
하늘이 참으로 예쁘게 보이는 탁 트인 넓은 방은 당연히 큰아이몫이었을 테지,
한데 큰아이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온갖 정성을 다할수록 어긋나는 나의 생각들, 그것이 점점 커져가고 있단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건강하게만 잘 자라다오 아들아,라는 생각을 했던 엄마는 온데간데없이 무색하기만 했다. 아이에게 바라는 기대가 점점 높아지니 그에 더불어 강압적인 태도로 엄격하게 아이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는 엄마만이 남아있었을 뿐.
오늘 아침 일어나 창밖으로 솜사탕처럼 예쁘게 보이는 벚꽃나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뜬금없지만 생각해 본다.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고픈 맹자의 어머니 마음 같았던 나였다. 그러나무엇 때문에 아이와 균열이 생기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여 지금몹시 흔들리고 있다.
이쯤에서조금 덧붙이자면 나는 아이에게 본인이 원하는 태권도와 컴퓨터 수업 외에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며 내내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하는 엄마이다. 흔한 방문 학습지를 한번 시켜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아들과 내가 이토록혼란스러운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 학습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뱃속에서 나와 내가 키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 아이. 그로 인해 나날이 답답하기만 하다.
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도움이 되리라 ,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들은 과연 아이의 성장에 득이 아니라 독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 이상 삽질하지 말고 아이의 삶에 내 잣대를 이제는 그만 들이대자. 열세 살 내 아이를 그대로 봐주자.
그래야행복한 내일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제발 인정하자며 매일수백 번씩 되뇌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