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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혜 Jun 23. 2023

소나기 내리던 날에


준이는 내 동생 이의 외동아들 . 나의 조카이기도 한 아홉 살 남자아이다. 어제저녁. 식사를 마칠 무  반가운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이모. 오늘 엄청난 일이 있었어요. 아주 끔찍한 일이었어요." 준이가 들뜬 목소리로 뒤이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있잖아요.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막 뛰어서 집에 왔어요. 집에 돌아와 보니 너무 슬펐어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낮동안 서러웠던 기억이 생생해졌는가 보다.  아홉 살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해졌다. "오우, 그랬구나. 몸이 많이 젖었겠네. 속상했겠다. 엄청 추웠겠. 그래도 다행이다. 집에 잘 돌아왔으니까  말이야. 역시 준이는 엄청 빠르게 뛰었나 본데."  엄마, 아빠가 모두  직장으로 일하러 간 오후. 데리러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 작고 여린 몸으로 차가운 빗속을 달렸을 아이가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하여 괜스레 평소보다 오두방정을 떨어가며 준이와 이야기를 이어 갔을 테다.

"맞아요. 이모. 엄청 빨리 뛰었어요. 그런데 더욱 소름 끼치는 일이 일어났어요. 뭔지 알아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비가 그쳤어요."

작지만 발그스름 토실한 아이의 얼굴만큼.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준이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더없이 보송보송 예쁘기만 하다.   "이모도 어렸을 때 그런 적 있었는데.."


내내 아슬아슬 흐렸던 하늘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재빨리 2층 계단을 뛰어 내려와 1관앞에 섰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마침내 추적추적 내리는 비. 문앞에는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들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있다. 한손으로는 우산을 쓴채. 다른 한 손에는 또르르 말려 곱게 접어진 우산. 아이들에게 건네기 위일 테다.

나는 서둘러 방을 둘러봤다.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보이지 않는 걸까,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데리러 걸어오는 중일 테다. 조금 늦가 보다.

그때 친구 윤이의 엄마가 "영혜구나. 엄마 안 오실 건가 보다. 아줌마랑 우산 같이 쓰고 가자." 상냥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신다. 윤이도  같이 우산을 쓰고 가자며 내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렇지만 혹시  나를 데리러 올 엄마와 길이 엇갈릴까 봐 그럴 수는 없을 듯싶다. "아니에요. 저희 엄마는 조금 늦게 오시려나 봐요. 기다릴래요. 안녕히 가세요. 잘 가. 윤이야."


어느새 친구들은 자신의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버렸다. 몇분이나 지났을까, 빗줄기는 아까보다 거세졌다. 아직 한낮인데 저녁이라도 된마냥  캄캄하기만 하다. 내리는 빗소리마저 무섭고 요란하다. 이러다 금 천둥 번개라도 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내 팔과 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 엄마는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점점 요란해지는 하늘을 쳐다보 더 늦기 전 .아무래도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달리기는 번번이 꼴찌를 도맡아 하는 나지만. 힘껏 달렸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도. 하늘에서 양동이째 퍼붓는 듯한 빗소리도 천둥번개 소리만큼이나 분히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머리에서. 어깨에서. 가방에서. 바짓가랑이에서. 내 눈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처럼  걸으면 학교에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다.

내가 빠르게 뛰고 있으니 아무리 못해도 20분 정도면 집에 도착할 수 있겠지. 번개가 칠 때 나무아래에 있으면 큰일 난다고 그랬어. 소나무아래는 얼른 벗어나야 돼. 제발 좀 빨리 달려라. 소나무 숲이 우거진 우리 동네가. 내 다리가 그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을까,

눈물인지. 빗물인지. 뚝뚝 떨어지는 물이 서러웠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자. 곧바로  몸을 최대한 부르르 어 눈물과 빗물을 탈탈 털어 냈다. 그리고는 창호지가 곱게 발린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며 엄마부터 찾았다.

한데 엄마는 방 안에 앉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여유롭게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엄마가 어찌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 왜 학교에 데리러 안 왔어.  엄마 기다리다가 혼자 너무 무서워서 뛰어 왔잖아."                                                    

 그 순간 엄마가 이야기했다.  "아이 참. 영혜야.  저번에도 이야기했잖아.  여름에 갑자기 쏟아지듯 내리는 비는 소나기라고. 소나기는 조금 기다리면 그 거라고 그랬잖아. 학교에서 좀 더 기다리지 그랬어."

남의 속도 모르고 지금의 나보다 젊은 얼굴을 한 엄마는 두 뺨의 폭패인  보조개를 자랑하듯 환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맑고 장난스러운지 다시 한번 젊은 엄마의 얼굴이 얄미워졌다. 그러는 사이 사방에 환한빛이 비추고 곱던 엄마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러다   밝은 빛을 내는 식탁위 던트 조명이 내눈앞에 드러났다. 나는 여전히 식탁의자오도카니 앉았다. 어쩐 일인지 눈이 그렁그렁해진 채.


"준이야. 있잖아. 아주 오래전에 미화할머니가 말거든.  소나기라고 하는 비가 있데. 소나기는 잠시 기다리면 그치는 비라고 하더라. 준이가 오늘 만난 비. 이모생각에는 소나기였던 거 같아."내가 말했다.

"그랬어요? 할머니가요? 저도 다음에는 조금 기다려볼게요. 그런데 이모 오늘 제가 많이 속상했잖아요? 혹시 승이 형아랑 같이 게임  시간만 할 수 있어요? 오늘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아이템이 있거든요." 기분이 한결 나아진 걸까. 준이는 해맑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조카 준이.

홀로 애쓰며 보냈을 오늘. 훗날 너의 시간에서 어떠한 의미로든 소중히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기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너의 마음.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어른으로 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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