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야 할 의무
막내는 밤마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대부분 아빠의 군대 경험담이다. 아빠가 군대에서 훈련받던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 군대에서 귀신을 본 이야기… . 아내는 그걸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막내는 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물어보진 않았지만, 막내는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보다 아빠의 쓰잘데기 없는 군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유일하게 엄마를 이기는 순간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의 힘이다.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군대 귀신 이야기다. 소대원 중 귀신을 보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관종인줄 알았는데, 몇몇 사건을 거치며 이 녀석의 능력이 입증됐다.
몇몇 사건이란 이렇다.
위병소 근무를 서던 그 친구(편의상 '관종'이라 부르겠다)가 사수에게 “곧 정전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강원도 산골 부대라 종종 정전이 되긴 했었지만, 그래도 정전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수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고 묻자, “저기 전봇대 위에 귀신이 서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몇 분 안 있어 정전이 됐다.
또 다른 사건이다. 야간 근무를 서던 관종이 사수에게 “소대장님이 곧 순찰을 나오실 겁니다”라며 근무를 똑바로 서고 있자고 했다. 소대장이었던 나는 그날 일직사관으로 야간 순찰을 돌아야 했는데, 내 순찰 시간은 나만 알고 있었다. 아니, 나도 몰랐다. 그냥 상황실에 있다가 졸리면 산책하듯 나가는 게 순찰이었으니까. 관종은 이번에도 귀신이 알려줬다고 했다. 귀신이 내 모습을 하고 순찰을 돌며 자신의 눈 앞까지 와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귀신의 순찰 직후 나는 야간 근무자 순찰을 나갔고, 관종의 예측은 다시 적중했다.
그냥 우연인지, 아니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관종은 부대에서 가장 사랑받는 막내가 됐다. 부대 전입 초기에는 ‘고문관’이라며 왕따를 당했었는데, 특별한 능력으로 누구나 함께 근무를 서고 싶은 1순위 병사가 된 것이다.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낀다. 사람들은 똑 같은 사건을 두고서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서로의 경험이 달라서 그렇다. 하나의 사건은, 내가 만들어온 인생 이야기를 통해 완전히 다른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도 ‘의도가 무엇이냐’며 의심하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그냥 ‘힘든 인생을 사셨나보네요’라며 슬며시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도대체 어떤 삶의 이야기를 살아왔길래, 세상을 저렇게까지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걸까.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가 어두우니,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자”고 약속했다. 최근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이제는 ‘재미진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만의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마음가짐이 긍정적이면 세상도 즐거운 이야기로 응답할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해석하는 것은 내 경험에 근거하므로, 결국 나의 우울함 역시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즐거워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