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영화 솔라리스, 김용규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김주환의 내면소통

by 소풍보름

#1. 아내의 팩폭

아내는 겉과 속이 같다. 나는 아내와 같이 살면서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거침없이 속마음을 말해버리니까. 팩폭이 장점인 그녀는 며칠 전에도 젖은 머리를 말리던 내게 상처를 줬다.

“말릴 머리도 별로 없으면서.”

이게, 탈모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어찌됐든, 나는 이런 아내가 좋아서 결혼을 했고, 팩폭을 즐기며 살고 있다. 아내가 “A”라고 말 하면 그냥 “A”로 받아들이면 된다. A라고 말 한 의도, 그 뒤의 숨겨진 의미, 거짓말인가 진실인가…뭐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좋다.


#2. 노희경, “솔직함은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생 때 노희경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솔직함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는데, 인상 깊은 말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언젠가 ‘솔직함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느 것도 나를 상처 줄 수 없다. 다만 거기서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우리 조카들한테도 자주 해 주거든요. 이런 것을 느끼면 오히려 부끄럽다고 느낄 수 있는 자신의 과거가 자랑이 돼요. (중략)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경험은,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남들도 그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다는 거죠. 마치 목욕탕에서 남들 옷 벗으니까 나도 벗는 것처럼 말이죠.”(인터뷰_드라마 작가 노희경(1/2) : 네이버 블로그)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허탈하다면 나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내가 거짓의 옷으로 한껏 치장한 말들을 떠벌렸으니, 남들도 내게 솔직한 말을 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대화에 알맹이가 없는 거다. 허탈할 수밖에.


#3. 거짓말 끝판왕

거짓말에도 레벨이 있다. 나 스스로를 속이는 단계까지 가면 거짓말 끝판왕이 된다. 의학 용어는 아니지만, 흔히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끝판왕이 되려면 스스로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변 상황을 조작하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스며드는 연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메쏘드 연기’이다. 거짓말 상황에 자신을 던져, 마치 그것이 실제인 것처럼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냥 “미안, 내 잘못이야”라고 말하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노력을 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곳이 회사라면 주변을 괴롭혀야 한다. 없는 보고서를 만들게 해야 하고, 직원들을 메쏘드 연기에 동참시켜야 한다. 무엇이든, 끝판왕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4. 김용규,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김용규 작가의 초기 저서 중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있다. 절판이 된 책이다 보니, 중고책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이 책에서 김용규 작가는 영화 <솔라리스>를 하이데거의 ‘양심’으로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솔라리스 행성을 연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탐험대가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혼란에 빠진다. 자꾸 헛 것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주인공. 솔라리스 근처의 우주선에 도착한 그는 자살한 연인을 만난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기까지 하는 연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영화는 ‘어떻게’가 아닌 ‘왜’에 중점을 둔다. 왜 그들은 헛 것을 보는 것인가.

하이데거는 양심을 ‘탓 하는 부름’이라고 말했다. 불편해서 외면한 것, 모르는 척 치워두고 지나온 것들이 나의 내면에 켜켜이 쌓여 있다가 불쑥불쑥 불러대는 것. <내면소통>의 김주환 교수가 말하는 ‘배경자아’가 ‘경험자아’에게 노크하는 것. 이것이 양심이다. 솔라리스에 가까워질수록 양심이 물화(物化)되어 탐험대원들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5. 탓하는 부름에 귀 기울이기

<내면소통>에 따르면 ‘경험자아’는 이야기 덩어리라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마음근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핵심은 ‘배경자아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경험자아의 습관적 스토리텔링 방식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습관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즉, 거짓말)’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건강한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바뀌어 갈 수 있다고 한다.

개념이 어렵긴 한데, 그냥 배경자아를 ‘양심’이라고 해석해보자. 그리고 영화 <솔라리스>의 탐험대가 환각을 보는 이유를 떠올려보자. 탓하는 부름(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거짓 상황을 만들어 스스로 그 거짓을 믿어버린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거짓이 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갈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그 거짓은 나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릴 것이다. 거짓말을 들켜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탓하는 부름이 나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맘 편히 살자. 그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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