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근길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전쟁터다. 회사의 분위기가 치열하고 열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과 아군이 선명하게 존재해서 ‘전쟁터’라 부르는 것이다. 회사를 전쟁터로 만든 것은 ‘윗분’이다. 윗분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다.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던 내가, 부지불식간에 ‘회사의 적’이 된 것은 2024년 초의 일이다. 그 윗분으로부터 “너는 누구를 위해 일을 하냐”는 질문을 몇 차례 받았는데,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속으로는 ‘이 사람이 미쳤나’라는 생각만 했을 뿐 딱히 답을 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적군이 됐고, 나의 조용했던 회사는 전쟁터가 됐다.
<몬스터>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일본 만화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썼으며, 배경은 독일과 체코이다. 뇌 외과 전문의인 ‘텐마’는 머리에 총상을 입은 소년 ‘요한’의 수술을 집도한다. 하지만 이 소년은 그동안 양부모를 네 명 이상 죽인 연쇄 살인범이었다. 그는 텐마의 기적적인 수술로 목숨을 건진 후에도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을 이어간다. 괴물 같은 요한의 목숨을 살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텐마는 자신이 직접 요한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살인 누명을 쓴 채 요한을 추적한다.
그런데, 요한에게는 쌍둥이 여동생 ‘니나’가 있다. 니나 역시 텐마처럼 요한을 쫓으며, 그를 죽여 연쇄살인을 멈추려 한다. 하지만 이 쌍둥이들은 둘 다 어릴적 기억이 없으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이, 요한이 왜 괴물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열쇠가 된다.
(스포일러)
구 동독에서 제 2의 히틀러를 육성하기 위한 실험이 있었다. 요한의 부모는 이 실험에 이용당했고, 쌍둥이 역시 실험 도구가 된다. 엄마는 요한과 니나 중 한 명을 ‘낭독회’라는 이름의 실험에 보내야 하는 잔혹한 선택 앞에 놓인다.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내 손을 놓치 마”라며 애원을 하지만, 엄마는 그 중 한 명의 손을 놓는다.
“엄마는 우리 중 누구를 선택했던 걸까요? 둘 다 여장을 하고 있어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던 우리 중, 누구를 선택했던 걸까요? 누구를 버린 걸까요?”
마지막 장면에 요한이 하는 대사이며, 이것이 그의 복수심 중 한 축을 이룬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뇌는 세상을 딱 두개로 나눈다. 아군과 적군, 성공 아니면 실패, 선택 아니면 버려짐 등 이렇게 극단적인 이분법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한데, 이런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하려는 것이다.
윤홍균 교수님의 <마음 지구력>을 보면 흑백논리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처방이 나온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메모를 써서 책상에 붙여두는 거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려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유가 있겠지”라며 세상을 포용하려 노력한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세상을 흑백이 아닌 스펙트럼으로 본다. 그 방법이 바로 이런 태도다.
<몬스터>의 요한이 “엄마에게 말 못할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24년 12월 3일, 우리나라에 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을 선포했던 사람은 평소 고집이 세고 자기 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계엄의 이유도 명확하다. 국회에 ‘종북 세력(적군)’이 있기 때문이란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흑백논리’가 12월 3일 계엄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한 것 같다. 대통령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국가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한동안 우리 사회가 계엄과 탄핵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황당한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이런 충격적이고 황당한 ‘흑백논리’는 없는지 살펴보면 어떨까. 충분히 있을법한데, 이런 폭력이 너무나 일상화돼서, 우리가 그것조차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왜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거운지, 내가 왜 회사를 전쟁터로 느끼고 있는지, 내가 왜 매일 퇴근길에 번아웃을 경험하는지,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면 ‘힘 있는 누군가의 흑백논리’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자. 이것만 자각해도 회사 생활은 조금 가벼워질 수 있다. 현실은 당장 바뀌지 않겠지만, 마음은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혹시 당신이 느끼는 업무 스트레스도, 단순히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흑백논리라는 비정상적인 룰 속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