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모여 외모 이야기를 하다가 거의 모든 여자아이들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속쌍꺼풀이 있어서 겉쌍꺼풀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이건 나 자신의 개인적인 미의 기준이었다기보다 각 학년에서 가장 예쁘다고 손꼽히는 여자아이들이 모두 겉쌍 꺼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그렇듯 다양성보다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획일화된 미의 기준이 청소년들의 인식을 사로잡았다. 친구들은 매력적인 여성을 볼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예쁘다." 아니, 애초에 예쁘면 예쁘다고만 할 것이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닌데'라는 말은 왜 붙이는 건데?
전형적인 미인은 대체 뭘까. 친구들은 전형적인 미인의 예시로 이런 사람들을 들었다. 김태희, 전지현, 송혜교, 한가인. 야, 너네 '전형적인'의 의미는 알고 쓰는 거니? 이분들이 무슨 전형적인 미인이야? 미친 거 아니야?
'전형적이다'의 뜻은 '어떤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또는 그런 것'이다. (출처: 국립국어원) '전형적이다'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다.
1)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고3이다.
: 새벽에 일어나 등교해서 하루 종일 수업 + 공부로 찌들며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고 운동량은 적은 대신 음식 섭취량이 굉장히 많은 고등학생. 주말에는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듣는 경우도 많다. (아 그렇다고 모두가 성적이 좋은 건 아니다.)
2) 그는 전형적인 꼰대다.
: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이런 것도 모르냐'라고 윽박지르면서 별로 니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때 스스로 인생선배가 되어 여러 가지 충고를 해 주는 사람. 그런데 듣고 나서 보면 조언이 아니다. 사실은 자기 자랑임.
3) 오늘 날씨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름 날씨이다.
: 체감온도 37도 정도 되는 날씨. 샤워를 10분 간격으로 하지 않으면 에어컨이 없는 집은 살 수가 없음.
'전형적이다'는 다른 말로 '대표적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고3이다.'라는 말을 하면 대표적으로 '아,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김태희 씨는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 아니에요. 그냥 엄청난 미인인 거라고요. 전형적인 미인상이 아니고.
전형적인 한국 미인을 연예인으로 설정해 버리는 바람에 '전형적인 미인'이 너무 상향 평준화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미의 기준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버렸고. 눈은 겉쌍꺼풀이 있는 큰 눈, 코는 오뚝하며 입술은 선홍빛이고 적당히 도톰해야 한다. 턱은 사각턱이면 안된다. 미간은 너무 좁아도 너무 멀어도 안되며 이마는 좁고 얼굴 크기는 작아야 한다. 화장은 청순하고 깨끗한 느낌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그놈의 '전형적인 미인'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긴 생머리는 덤.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외국인이 "한국의 여자 연예인이나 아이돌들을 보고 '한국에는 저런 여자들이 많은가 보다'하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서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는 미디어의 힘이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헛된 희망을 심어놓고 실망하게 만들다니. 애초에 기대를 품게 한 건 미디어인데 왜 실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송혜교 전지현 김태희의 전성기는 2021년에도 진행형 < 드라마 < 방송 < 기사본문 - 아이즈(ize)
늘 내 주변에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전형적인 미인상'을 기준으로 내 얼굴을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너는 미간이 진짜 좁고 눈이 몰려 있어서 아이라인을 길게 그려야겠다"라고 충고해 주는 애가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미간이 좁은지도 모르고 살았다. 나는 내 미간이 비정상적으로 좁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늘 다른 사람의 미간과 내 미간 길이를 비교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니 확실히 내 미간은 좁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가오리의 미간을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사람들의 외모 지적은 자연스럽게 내 콤플렉스로 자리 잡았다. 내가 혼자 거울을 볼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애초에 사람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 있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 얼굴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미간이 보통 사람보다 좁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너네 집에는 미간 재는 줄자라도 있는 거니?" 나는 진심으로 그 애한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언젠가 나의 동지인 속쌍꺼풀 친구 S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S: 네가 보기에 나 쌍꺼풀 수술해야 할 것 같니?
나: 지금도 예쁜데 네가 느끼기에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면 해.
이건 진심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꽤 여러 방면으로 잔인했다. 한편에는 "교내에서 가장 예쁜 아이", "우리 중에서 가장 예쁜 애" 같은 걸 정해두고 그들을 추켜세웠다. 그러다 보니 외모지상주의는 팽배해졌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자존감을 키우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지적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외모와 자신의 가치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사람들의 몹쓸 말들을 견뎌내야 하는 건 온전히 외모 평가를 당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미적 기준에 맞추면서 살거나 그런 것에 맞추지 않고 내 멘탈을 뜯어고쳐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견뎌내거나. 결국 변해야 하는 건 다른 이들인데 말이다. 차라리 자존감을 키우라는 말보다 상대방한테 욕 한 바가지 할 수 있는 대범함을 가르쳐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 애초에 외모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아니야 너 예뻐 지금도 괜찮아'라고 말해도 본인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다. 그럴 때는 수술이나 시술을 해서라도 본인의 콤플렉스를 없애고 자신감을 되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성형의 순기능이란 이런 거다. <콤플렉스를 없애고 자신감을 되찾는 것>.
성형을 해도 안 해도 어차피 주변에서 남의 얼굴을 갖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은 많다. 쌍수를 안 하면 눈이 작다그러고. 쌍수를 또 하면 부담스럽게 왜 했냐 그러고. 그러니 본인의 얼굴에 콤플렉스가 있다면 그냥 해버리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속쌍꺼풀로 살고 있으며 콧구멍은 500원이 들어갈 정도로 크고 미간은 정말 좁다. 그런데 그냥저냥 생긴 대로 살고 있다. 일단은 수술할 돈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외모 지적으로 한 때 진절머리 나도록 콤플렉스를 겪었지만 외모 지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자기 얼굴에 엄청난 콤플렉스를 갖고 있구나' 생각하고 넘겨버리게 되었다. 내가 미간에 콤플렉스를 가졌을 때 다른 사람의 미간만 쳐다봤던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더 큰 단점을 찾아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하는 위안감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속쌍꺼풀은 사진을 찍으면 잘 드러나지도 않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사진에 내 얼굴이 꼭 예쁘게 나와야 할까? 그냥 행복해 보이게만 찍히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 하기 시작하니 굳이 겉쌍꺼풀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예쁘지 않으면 뭐 어떤가. 나는 꼭 사람들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미인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사는 데에 불편함만 없으면 어떤 얼굴이든 괜찮은 게 아닐까.
어쩌지. 나는 전형적인 미인상도 아닌데 이 글을 쓰다 보니 터무니없이 자신감이 높아져 버렸다. 그건 그렇고 내 미간이 좁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외모 지적할 때마다 나한테 1억 씩 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꽤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지적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