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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존재할 내 짧은 머리 팬클럽의 힘을 빌려

by 정휘지

허리 끝자락에 닿는 머리가 월요일 아침보다 성가셔서 가위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거실을 쏘다녔다. 가위를 찾아 세면대 앞에 섰는데 긴 생머리 팬클럽이 결사반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머리, 절대 안 돼! 긴 생머리, 절대 고수!"


사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게 있어 짧은 머리는 실연의 결과물이거나 속세와 단절하여 덕을 쌓는 일의 시작이었을 뿐 멋을 내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긴 생머리냐, 단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햄릿처럼 비장하게 외치는 내 모습에는 '답정너' 태그를 붙일만하다. 머릿속에서는 내 긴 생머리 팬클럽 친구들이 나를 만류하고 있었다.


팬 1: 너도 잘 알지 않아? 넌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린다니까? 저번에도 자르고 후회한 거 잊었어?

나: 하지만 너무 더워.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하고 싶은 걸.

팬 2: 기분 전환에는 다른 방법도 있잖아. 다른 방법을 찾아봐. 아니면 단발병 치유 사진을 찾아보라고.

나: 아니 근데 진짜 별로였어? 계속 보니까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고. 내 단발.

팬 1: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긴 생머리가 훨씬 나아. 굳이 안 어울리는 걸 해야겠니?

나: (울상을 지으며 침묵하기에 이른다)


긴 생머리 팬클럽을 만든 건 8할이 내 주변인들이다. 내가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하면 고개부터 젓는 우리 엄마. 너는 긴 생머리에 앞머리 있는 검정머리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못 박아 주는 은영이. 그 옆에서 아냐. 앞머리는 없어야 돼.라고 거드는 수민이까지. 애석하게도 거기에 한술 더뜨는 건 인별 그램이다. [남자들이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이유] 같은 동영상이 내 시야를 배회하면 나는 덜컥 겁을 먹고야 만다.

- 아. 작년에 단발이어서 차였나?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긴 생머리 팬클럽 친구들을 어떻게든 설득하고 나는 열대야를 조금 덜 덥게 보내야만 한다. 덜 더워야 한다는 건 핑계고 나는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었다. 그러자 긴 생머리 팬클럽 인간 하나가 내게 얼음물을 들이부었다.

"그다음엔? 못생겨지는 건 어쩔 거지?"


내가 짧은 머리가 되어 할 수 있는 최대의 후회를 생각해본다. 머리야 언젠가 길러 길러 다시 지금처럼 허리 끝자락까지 닿을 텐데. 내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최대의 후회는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못생겨질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혹시 누가 알겠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먹고 싶은 것도 다르니 내일의 내겐 짧은 머리가 더 귀여워 보일 수도 있잖아.


긴 생머리를 절대로 고수하라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나는 가상의 팬클럽을 만들어 그들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이름하야 <짧은 머리 팬클럽>이다. 긴 생머리 팬클럽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나의 강박이 만들어낸 결과라면 짧은 머리 팬클럽은 나의 '어쩌라고' 마인드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안 청순해져도 된다고! 상관없다고! 난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을 뿐이라고! 그렇게 긴 생머리 팬클럽을 향해 내가 외치자 짧은 머리 팬클럽 녀석들은 옳지! 잘한다! 너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성원에 힘입어 나는 기어코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우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현실은 그것보다 더 가혹한 경우도 있지만 막상 껍질을 벗겨내면 별 것 아닌 일들도 많다. 긴 생머리 팬클럽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의 짧은 머리는 제법 성공적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스스로가 귀여워 놀라고 말았다.




202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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