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동행
가을이 깊어간다는 건, 사람들의 옷깃이 조금 더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얇은 겉옷 하나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거리마다 두툼한 패딩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햇살만큼은 여전히 따뜻했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차 안에서, 나는 잠시 창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물이 들기 시작했고, 가로수 잎들은 조금씩 가을색을 입고 있었다.
신호등에 앞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느린 걸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휠체어를 미는 한 남자 어르신이 계셨다.
휠체어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고, 두 분은 서로에게 온 마음을 기울이는 듯했다.
남자 어르신은 조심스레 바퀴를 밀었다.
남들은 빠르게 건너가지만, 두 분은 천천히 건너고 계셨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한 약간 경사진 내리막길이었다.
휠체어가 흔들리는 순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마음을 조아렸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길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앞을 바라보며 손짓으로 방향을 알려주셨다.
아마도 산책길을 안내하시는 듯했다.
“조금 더 오른쪽이야, 거기, 거기.”
그 작은 손짓 하나에도 오랜 세월의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세상엔 여전히 이런 사랑이 남아 있구나.’
누군가를 위해 천천히 걸어주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가장 소중한 온기였다.
산책로 입구에는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아 있었다.
두 분의 패딩 입은 등 뒤로 낙엽이 떨어지고, 가을 산책길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오늘의 저 노부부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저 “천천히 가자”라며 함께 걸어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차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핸들을 잡고 천천히 출발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노부부에게 머물러 있었다.
조금 더 가다가 다시 신호에 걸렸을 때, 나는 라디오를 켰다.
마침 부드러운 가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수의 목소리 속엔 ‘함께 걷는 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창밖의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반짝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이다.’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있는 시간, 기다려주는 시간, 그리고 천천히 손을 잡아주는 그 순간.
그것이 사랑이고, 인생의 가장 깊은 온기가 아닐까.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로 따뜻한 길을 걷는 두 사람.
그들의 뒷모습이 낙엽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이 그 그림자를 단단히 엮어 놓은 듯했다.
가을은 떠남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는 오늘 그 길 위에서 ‘머무름’을 보았다.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주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색이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와 저렇게 걷고 싶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은, 천천히 걸어도 되는 길.
서로의 걸음을 맞추며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길 말이다.
오늘도 그 길 위엔 낙엽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걸어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가장 아름다운 길은 빠르게 걷는 길이 아니라,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가을빛 아래, 그 노부부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따스한 장면 하나가 내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랑은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바로 저기, 그 천천한 걸음 속에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