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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실린 편지 Sep 30. 2024

보이지 않는 갈등

향수병이 시작

일본 생활은 단순히 공부를 하기 위한 유학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였다. 그래서 나는 이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준비를 했다. 10년이라는 긴 유학 생활을 결심하며, 그 여정의 출발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혼수용으로 준비했던  자수 평풍이 생각났다.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수놓은 한국의 자수 전통 평풍은 혼수용을 준비했던 것인데 주고 싶었고 아깝지가 않았다. 이 평풍은 나의 노력이 깃든 혼수용으로 준비했던 재산 1호였다. 소나무와 학의 그림이 있는 모양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평풍을 통해 일본에서 한국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 평풍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항에서 그 소중한 이삿짐을 부치고  나는, 비록 떠나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 늘 고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이곳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단순히 유학생으로서의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한국인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특별한 삶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장학금 덕분에 학비 걱정은 덜었지만, 그 혜택은 종종 나를 억누르는 듯했다. 학업과 생활비는 돈이 안 들지만 나의 용돈이 필요했다. 다른 일본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이어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감사함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그 감사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무게감은 때로는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내가 장학금을 받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 사사까외료이찌라는 사회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자손이 없어 대를 이을 인물이 없었다. 고야산대학출신의 지금 절의 주지가 양자로 선택되었다. 그 분은 그런 연유로 나의 학업을 지원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모든 학비를 지원받았고, 장학금 수혜자로서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사회사업가의 뜻을 계승하여 한국에서 공부하러 온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이슈였다. 가끔 기자들이 취재 하러왔다. 나의 사진을 찍어가고, 신문에 기사가 실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고야산에서 공부한다는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이목을 끌었고, 한국에서도 나를 만나러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학생일 뿐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고야산은 성지였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누구는 한국은 어디있냐는 등 질문을 던질때 나는 흥분하였다. 때로는 한국의 문화를 깎아내리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학자들 역시 마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한국의 외교관이 된 듯, 내 목소리로 한국을 대변했다. 교육 과정에서 "외국에 나가면 한국의 외교관이 되어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비록 정식 외교관은 아니었지만, 내가 해야 할 역할은 바로 그 말처럼 느껴졌다. 경험이 부족했지만, 나는 내 나라를 지키고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 시간들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한국의 자부심을 품고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견뎌냈다. 일이 힘들때면 콜렉트 콜로 집으로 전화하여 하소연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어려움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하게 여겼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어려움과 고난을 돌아보며 감사함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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