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밭에서 김치를 그리워하다
봄이 오면,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페스티벌 행사가 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롭게 즐기며 축제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그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그 시기, 지인과 어딘가로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여겨졌지만, 나는 그저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어느 날, 소풍 가듯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주먹밥을 싸고 캠핑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다께노꼬"를 캐러 간다고 했지만,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온 가족이 큰 버스 같은 차에 올라 시골로 향했을 때도, 나는 그저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며 낯선 경험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 도착한 곳은 대나무 숲이 울창한,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했지만, 호기심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땅을 파며 죽순을 캐고 있었다. 삽 같은 도구를 사용해 땅을 뒤집는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듯 보였다. 한국에서 귀한 식재료로 여겨지는 죽순을 이렇게 직접 캐는 모습은 나에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도 그들의 손짓을 따라 죽순을 캐며 이 문화 속에 잠시나마 녹아들고 있었다. 준비해 온 간단한 주먹밥으로 식사를 나누며 꼭 필요한 양만큼의 식사를 하였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죽순 캐기 행사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특별한 전통이었다. 그렇게 많은 죽순을 캐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죽순을 쌀뜨물에 담가 끓이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죽순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고, 고급 요리 재료로만 쓰인다는 말에, 이 작은 작업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일본에서 나는 이렇게 조금씩 그들의 삶과 문화에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문화 속으로 스며드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에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만 갔다. 무엇보다도 가장 그리웠던 것은 한국 음식, 특히 김치와 짜장면이었다. 이국 땅에서, 한국 음식의 그리움은 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한국 김치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한국에서 고춧가루를 공수해 배추와 무를 사서 김치를 담갔다. 하지만 김치를 담그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무 자체가 한국에서 먹던 것과 달랐다. 아무리 손질을 하고 소금을 절여도, 그 맛은 내가 그리던 깍두기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추를 사용해 막김치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실패였다. 한국에서 쓰던 재래식 왕소금을 구할 수 없었기에, 그 절인 맛을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재료는 재료대로 낭비되고, 나는 깊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렇듯 70년대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외국에서의 적응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지만, 특히 한국인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문화적 갈등은 더욱 컸다. 그들은 철저히 일본식 전통과 질서를 중시했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그 문화 속에서 언제나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적응시키며 살아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깊이 느꼈다. 그들은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매년 열리는 죽순 캐기 행사처럼, 그들은 자연 속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나도 그들의 세계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리움은 적응의 과정에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김치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그날들조차도 지금에 와서는 웃음이 나오는 추억이 되었다. 비록 나는 일본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화될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시간들이 내게는 중요한 의미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