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퍼야, 너는 혹시 아니?

by 이제은


며칠간 내리던 을씨년스러운 비가 그치고

햇빛이 구석구석 내리 앉으며

휑하던 나무들도 초록 숲들을 이루어

찬란한 봄날 아침 햇살을 반기었다.


싱그러운 초록 나뭇잎들

생김새도 제각각

색깔도 제각각

그래도 다 함께 봄날 아침 햇살을

사이좋게 나누어 반기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왠지 살랑이는 그 나뭇잎들을 지나쳐

집으로 걸어오는 내 마음에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노래를 흥얼거렸다


집에 도착해 어깨에 메었던

무거운 장바구니들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켠 다음 겉옷을 벗으려

지퍼를 내렸다


즈즉

즈즉

지퍼는 가슴높이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았다


옷이 끼었나?

지퍼를 내려다보니 지퍼 사이에

겉옷이 살짝 끼어있었다

이럴 때는 살살 달래듯 지퍼를 움직이던

엄마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지퍼를 살살 달래며

낀 옷도 살살 달래며 움직여보았다


즈즈즉

즈즈즈윽

지퍼는 조금 움직이나 싶더니

또다시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다.

이런 고집 센 녀석 같으니라고

좋게 말을 할 때 들어주면 참 좋으련만


몇 번이나 달래 보았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지퍼에

순간 훅 하고 화가 올라왔다

옷을 잡은 두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순간 확 하고 옷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옷은 찢어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지퍼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내 가슴이 이렇게 답답한 이유는

지금 내려가지 않는 이 지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리도 저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옴짝달싹 거리는 지퍼나

내 마음이나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내 마음에는

도대체 무엇이 끼어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없는 현관에 서서 물었다.

지퍼야, 너는 혹시 아니?

지금 내 마음을 이렇게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도대체 누구인지.


아무런 대답 없는 지퍼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으로 지퍼를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한동안 있으니 손등은 호흡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마음이 점점 차분히 가라앉았다

초조함도 불안함도

함께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는 집은 고요했다

지퍼를 누르던 손을 내리며

가슴을 한번 쓰윽 쓸어내렸다


나는 발코니로 걸어가

초록 나무들과 봄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들변함없이

사이좋게 아침 햇살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름다웠다.

초록 나무들도

살랑이는 나뭇잎들도

반짝이는 아침 햇살도.

마음이 금세 행복으로 풍풍

차올랐다.

살포시 손을 들어

다시 지퍼를 내려보았다.

역시나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왠지 마음이

한결 차분했다


왜냐하면 이 지퍼나 내 마음이나

둘 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기에.

무엇이 끼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빼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했기에.


지퍼에 낀 옷을 살살 잡아당기며

여러 번 위로 아래로 지퍼를 움직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내려갔다


허허허

허탈하면서도 신기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반짝거리는 아침햇살 한 줌이

마음에 샤르르르 녹아든 듯했다.


지퍼와 초록 나무들과

살랑이는 나뭇잎들과

봄날 아침 햇살이

내게 건네준 작은 기쁨이

내 마음속에서 변함없이

반짝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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