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오늘의 시: 나태주 시인님의 꽃들아 안녕

by 이제은


햇빛이 내리쬐는 조금 뜨거운 날씨에 저벅저벅 걷다 보니 어느새 검은 머리도 함께 뜨뜻해졌다. 얼굴에도 열기가 올라왔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걷잡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다.


서늘한 바람의 감촉은 황홀했다.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감촉에 순간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달구어진 이마와 볼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작은 감정 도깨비들도 하던 일들을 멈추고 기분 좋은 바람에 몸을 맡긴 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서있으니 종알 종알 지저귀는 참새 소리와 사라락 사라락 움직이는 다람쥐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마치 커다란 숲 속 한가운데에서 다시 눈을 뜰 것 만 같았다.


길 한가운데에서 눈을 감으면 왠지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이거나 혹 앞을 못 보고 빠르게 걷는 행인에게 부딪힐까 걱정되어 차마 눈을 감진 못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키가 쭉 뻗은 큰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마침 내가 멈추어 서있던 곳에는 넓적하고 큼지막한 초록 이파리들이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이파리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 순간 길 한가운데 서서 머리 위 나무 이파리들을 찍는 모습은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보다.


넓고 큼지막한 초록 이파리들.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의 나뭇잎들의 이파리들을 흔들거렸다. 그러자 그동안 내게 머물렀던 오래 묵은 감정들과 기억들도 함께 흔들거렸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나의 세계는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강하게 몰아쳐 올라온 감정들과 기억들에 잠시 울렁거렸다. 마치 꿈을 꾸는 듯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바닥이 흔들리는 듯했다. 처음 느껴보는 희한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부셨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 사이로 강렬한 햇살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집 가까이 다가가는데 문득 어느 아파트 앞의 작은 텃밭에 핀 붉은 장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요사이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며칠 사이 피어난 것일까? 길가 모퉁이 작은 텃밭에 붉게 피어난 장미들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항상 느끼지만 눈으로 담는 것이 가장 예쁜 것 같다.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일까. 사진을 찍고 난 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까보다 더 오랫동안 꽃들을 바라보았다. 꽃송이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고 싶어서였을까. 활짝 핀 꽃송이도, 막 피기 시작한 꽃송이도 모두 예뻐 보였다.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에 용기가 피어남을 느꼈다.



퇴근길 마주친 어느 집 작은 텃밭에 핀 장미꽃들


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태주 시인님의 시, '꽃들아 안녕'이 생각 났다.


꽃들아 안녕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한참 동안 꽃들을 바라보고는 집에 걸어가는 길에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걸었으나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씩씩하게 큰 보폭으로 걸으며 나는 바람에게 부탁했다.


"바람아 바람아, 내 안의 케케묵었던 안 좋은 감정들과 기억들을 모두 가져가 주겠니?

그래서 깨끗하고 시원하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결에 소망을 담아보았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제대로 된 마무리 또한 매우 중요하다. 좋은 끝맺음은 결국 더욱 안정적인 출발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좋았던 것에는 마땅히 감사함을 느끼고 혹 그렇지 못했던 것에 얽힌 감정들과 기억들은 흘려보내야 한다. 날려 보내야 한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끔 놔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끝맺음을 이룰 수 있으며 온전한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작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살면서 어느 순간 우리들이 맺는 끝맺음들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작은 꽃송이들로 하나 둘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나 둘 피어난 꽃송이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것이겠지. 장미처럼 꼭 화려하진 않아도 우리들의 꽃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채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나는 나태주 시인님의 시를 다시 떠올리며 내 마음속에 피어난 꽃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꽃들아 안녕!" 꽃송이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며.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에 감사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바람이 내 소망을 들어주었나 보다. 고마운 바람. 용기와 감사함으로 가득 채워진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내일도 새롭게 잘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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