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그라데이션

오늘의 시: 릴케의 '은빛으로 밝은'

by 이제은


<은빛으로 밝은: Im Schoß der silberhellen Schneenacht>

은빛으로 밝은, 눈이 쌓인 밤의 품에 널찍이 누워
모든 것은 졸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잠 깨어 있을 뿐.



어른이 되면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어른이 되고 나서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맞는 것인지

충분한 것인지

매일같이 물음표를 던진다

스스로에게


허공에 던져진 물음표들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영혼의 고독 속에" 몸부림친다.


때론 울렁거리듯

불안감으로

때론 숨이 막혀오는 듯

괴로움으로

때론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듯

우울함으로

때론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무기력함으로


이 모든 것은

슬픔의 숨은 얼굴들

그 깊이와 짙음에 따라

그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

말이 없는 영혼은

침묵으로... 침묵으로...


확고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오는 모든 불안과 괴로움과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가도

어느새 녹아서 뚝뚝 흘러내리고

금세 넘칠 듯 끓어올라

가득 채운다,

영혼의 고독 속을.



너는 묻는다, 영혼은 왜 말이 없느냐고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고—
그러나 영혼은 알고 있다,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
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
- < 릴케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중에서



감춰진 슬픔의 얼굴들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오로지 잠들지 못하고

고독 속에 깨어있는 영혼만이

슬픔의 얼굴들과 마주한다.

영혼은,

말이 없다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는 물음에

영혼은

대답 대신

슬픔의 얼굴들을 주섬주섬 모아

어느덧 저녁 노을빛처럼

예쁜 그라데이션이 된 슬픔을


저 거대하고 끝없는

밤의 품속이 아닌

메마르고 딱딱해진

자신 스스로의 품으로

부어 넣는다

가득.


"영혼은 알고 있다,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

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


그렇게 슬픔을 한가득

자신의 품으로 부어 넣고 나면

아직 남아있는 노을빛의 온기가

메마르고 딱딱해진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준다.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다.


허공을 헤매며

방황하던

그 많은 물음표들은

사실

저 거대하고 끝없는

밤의 품속에,

인생 속에,

떠 있는 작은 별빛들.


내가

나를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빛.

내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감싸 안아주는 빛.


잊지 말자.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와

때론 불안하고 괴로워도

때론 우울하고 무기력해도

내가 나를 믿어주어야 함을.

내가 나를 감싸주어야 함을.

별들이 빛을 잃지 않도록

슬픔 또한 품어주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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