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오늘의 시: 박두규 시인님의 '헛꽃'

by 이제은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하얀 산수국, 그 고운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헛꽃- 박두규>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어떤 날은 문득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은 날이 있다. 흙냄새, 꽃냄새, 풀냄새가 가득한 곳. 반팔을 입기에는 살짝 차가운 공기. 들이마시면 왠지 싱그러운 달달함이 느껴지는 곳. 발밑으로 느껴지는 흙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군데군데 있는 나뭇가지들이 밟힐 때 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땅 위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들. 길가의 이름 모를 작고 큰 식물들과 또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을 말동무 삼아 천천히 걷는다.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것들을 담는다. 처음에는 눈으로 담고 그다음에는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청각으로 숲을 느껴본다.


이 순간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말한 '숲'은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막이란 '고요하고 쓸쓸함, 의지할 데 없이 외로움'이란 뜻을 담고 있다. 시인은 왜 이 '적막을 본다'라고 표현했을까? 나는 다시 스스로를 내 기억 속의 숲으로 데려가 보았다. 아무도 없는 숲 속 한가운데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고요함이었다. 단지 소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항상 어떤 종류의 자극제가 존재하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으로 새로운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지쳐있었다. 선택의 종류가 너무 많아져서 괴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분명 선택의 종류가 많아서 좋은 점도 있겠지만 때론 머리가 아프고 힘이 들 때가 더 많았다. 그 중심에는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이 있었다. 그저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이라 믿고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갈대 같은 나약한 마음도 한몫했다. 나의 경우 컴퓨터와 핸드폰, 티브이가 가장 큰 자극제였고 지친 하루 끝에 맛있는 패스트푸드 음식들과 음료들 또한 자극제였다.


이 모든 자극제에서 나 스스로를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떼어놓는 공간이 바로 '숲'이 아닐까. 시인은 내가 나 스스로를 마주 할 수 있는 공간을 '숲'이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는 나 혼자이기에 당연히 적막한 것이다. 고요하고 쓸쓸한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누군가와 혹 어떤 매개체 (핸드폰, 컴퓨터, 티브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상태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때론 일 때문에 항상 핸드폰과 컴퓨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론 일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핸드폰과 컴퓨터를 하고 티브이를 켠다. 재미있고 즐겁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일들은 서서히 잊힌다. 나는 마음 편히 티브이를 보면서 그 안에 빠져든다 (혹은 핸드폰과 컴퓨터 속으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 안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몇 시간이고 화면을 보고 나면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소중한 하루의 시간이 다 흘러가버린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내 이야기이다. 그래서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티브이와 핸드폰, 컴퓨터에 '중독'되는 경우 대부분 마음이 심란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이다. 내 의지가 마음대로 조절이 잘 되지 않을 때 나는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치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받았으니까 , 하루쯤은 괜찮아' 라며 떳떳하지 못한 핑계를 둘러대곤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나는 내 안의 '적막'을 바라보기 겁이 나 이런 매개체들에 빠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겁이 나는 일이다.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외로운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대다가 제 풀에 지쳐버리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 휴식을 취하고 난 후에도 왠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수많은 월요일들. 지친 몸을 달래주기 위해 먹고 마시고 보았던 행위들은 과연 진정 내 몸을 위한 일들이었는가? 나를 위한 일들이었는가? 곰곰이 되돌아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이 행위들은 결코 나의 영혼을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처럼 가볍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더 무겁고 쳐지게 만들었다. 순간 나는 가벼운 나비의 영혼이 부러워졌다. 숲의 적막을 훨훨 나는 그 자유로운 날갯짓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영혼이 저 나비의 영혼처럼 날기 위해선 과연 내겐 어떤 일이 필요한 것일까? 일단 내 몸과 머리를 자극하는 것들에게서 잠깐이라도 나를 분리시켜 진정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은 마치 '숲'을 거니는 것과 같다. 여기서 '숲'은 말 그대로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될 수도, 집 앞의 공원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공간이든지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곳이면 가능한 좋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집안 거실에 앉아있지만 창밖으로 푸른 하늘과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 방금은 비둘기 두 마리가 발코니 난간에 앉아있다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자연 속을 걸으며 몸이 가뿐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조용한 곳에서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짧은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숲 속을 거닐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안정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정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숲'에 들어서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일단 '숲'에 들어가면 우리는 온전히 혼자가 된다. 곧 고요함과 쓸쓸함,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과 맞이한다. 고독과 마주한다. 나는 문득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읽었던 구절이 기억났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같이 있으면 금세 싫증이 나고 피곤해진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고독만큼 편안한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체로 방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고독하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항상 혼자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김석희 번역>


소로는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고독 속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않은 관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이건 사물들과의 관계이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독은 그의 말대로 우리 일상에서 꼭 필요한 친구임에 틀림없다. 고독을 통해 나는 스스로와 진실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다.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내가 하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는 일,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와 깊은 대화를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나의 영혼 또한 저 나비의 영혼처럼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고독의 무게만큼 영혼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얀 산수국, 그 고운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시인은 왜 헛꽃이 그의 적막 위에 핀다고 표현했을까? 산수국은 아래 사진과 같이 가장자리에 핀 화려한 헛꽃들과 중심에 핀 진짜 꽃들로 이루어져 있다. 헛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자신들의 화려함으로 곤충들을 유인해 산수국의 번식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릴 적 그저 파란 꽃이 신기해서 좋아하기 시작했던 산수국의 헛꽃들이 이제는 새로워 보였다. 그동안 몰랐던 산수국의 헛꽃의 존재에 알게 된 후 나는 산수국이 더 좋아졌다. 이 작은 산수국의 헛꽃들 마저 맡은 역할이 분명히 있다. 확실한 존재의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적막 혹은 고독 또한 맡은 역할이, 확실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헛꽃이 산수국의 번식을 돕듯이 고독 또한 나의 성장을 돕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평소 좋아하는 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은 듯하여 내 마음에도 보석을 찾은 듯 기쁨이 피어났다. 하얀 산수국, 그 고운 헛꽃으로 내 적막 위에도 조용히 피어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