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나의 천사를>
나는 나의 천사를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천사는 나의 품속에서 가난해지고 작아졌다.
그리고 나는 커졌다.
갑자기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천사는 떨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천사를 하늘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천사는 내 가까이에 그대로 있다.
천사는 떠다니는 것을 배웠고, 나는 삶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
- < 릴케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중에서
아주 어렸을 적 우리 집 거실에는 하얀 작은 아기 천사들 조각상이 있었다. 장난스럽게 올라간 둥근 볼과 반달처럼 휘어진 눈을 가진 곱슬머리의 아기 천사들은 작은 체구에 더 작은 하얀 날개들을 달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날개가 신기해 조각상보다 작은 손가락으로 그 끝을 조심스레 만져보곤 했다. 그리고 아기 천사들의 미소를 보며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나도 좀 알려주지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원 없이 신나게 뛰어놀았어도 항상 부족했었던 것 같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까지도 계속해서 놀고 싶어 했다. 방의 불이 꺼진 다음에도 매일 밤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난 장난을 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연구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작은 양손으로 틀어막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엄마는 귀신같이 우리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우리들 머리맡에서 기도를 해주시곤 했다. 내 얼굴만큼 큰 엄마의 따뜻한 손이 가슴 위에 느껴질 때면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던 심장은 엄마의 묵직한 손에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실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살포시 열린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엄마의 감긴 두 눈과 아주 신성한 주문을 외우듯 조곤조곤 기도하시는 엄마의 입모양이 보였다. 그 엄숙함에 압도되어 나는 엄마의 기도가 끝날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엄마의 기도는 항상 수호천사님께 우리들을 보호해달라고 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수호천사는 누구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으며 그 수호천사는 항상 우리들 머리맡에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나와 동생은 큰 겁을 먹었다. "우리 머리맡에 누군가 있다니?!!" 분명 내 머리 뒤에는 커튼, 그리고 그 뒤에는 베란다가 있는데... 나는 한동안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침대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꼭 확인한 후에야 잠이 들었다. 어떤 날은 괜히 돌아보기 겁이나 두 눈을 질끈 감고 막 배우기 시작한 주기도문이나 성모송을 외우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지금이야 똑같은 말을 들으면, '아, 수호천사들이 항상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이구나.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우리 머리맡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아직 비유나 은유의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 당시 나는 티브이에서 나오는 무서운 영화나 전설의 고향 같은 공포 장르들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무서움이 부쩍 늘었었다. 그렇기에 머리맡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마치 귀신이나 유령 같은 것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무서움도, 겁도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수호천사에 대해 잊었다. 그렇게 수호천사의 존재는 내게서 잊혀졌다.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적성을 찾고, 스펙을 쌓았다. 또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고, 직업을 찾고, 경력을 쌓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실체를 갖춘 것들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눈에 선명히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 측정될 수 있는 것들로 내 삶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 크고 좋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누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생각보다 참 많았다. 버리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필요 없거나 쓰지 않는 물건들을 골라서 과감히 버리고 오랫동안 묵혀놓기만 했던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정리했다. 또한 줄이고 아껴야 할 것도 많았다. 필요 없는 지출을 줄이고 하기 싫은 일을 미루는 게으름을 줄여야 했다. 하루에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일에 최적화된 삶을 살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아껴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버리고, 정리하고, 줄이고, 아끼기 시작했다. 일상이 점차 단순해지기 시작했고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해야 하는 일들은 제시간에 해결되었고 하루의 일과가 한결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 삶은 분명 더 좋아진 듯했다.
많은 것들을 버리고, 정리하고, 줄이고, 아끼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스트레스도 해소가 되었다.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니 기분전환이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한바탕 집 청소와 요리를 하고 땀을 내고 나면 화창한 날의 푸른 하늘처럼 기분이 상쾌해지고 개운해짐을 느꼈다. 그래. 내 삶은 분명 더 좋아진 듯했다.
내가 완벽한 주도권을 갖는 아침과 낮, 그리고 저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밤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고요한 어둠 속은 아무런 형태도, 소리도, 감촉도 없었다. 오직 완전한 공허만이 그 속에 존재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오는 불안감에 나는 본능적으로 양 손을 있는 힘껏 쥐어보았지만 내 두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숨이 가빠지는 듯 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워보았다. 여전히 어둠 속은 고요했다. 다만 이번에는 하루 종일 잊고 있던 일들이 하나 둘 그 고요한 어둠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떠오르는 일들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날 내가 속상했던 일들, 며칠 동안 걱정했던 일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 혼자 담아두었던 일들이었다.
'저 사람은 왜 나한테 그런 말을/행동을 했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아.. 아까 그러지 말걸 그랬나? 조금 더 00할껄...'
'정말 이상하다.. 왜 일이 그렇게 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 나는 왜... 왜...'
처음에는 고개만 살짝 내미는 듯 한 이 일들은 어느새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 고요한 어둠 속을 완벽히 장악해버렸다. 그 속에 깊게 내재되었던 감정들은 꿈틀거리며 살아나 거대한 해일이 되어 덮쳐오고 또 덮쳐오고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그저 두 손을 꼭 쥐고만 있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내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 나는 밤새 속상해하고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다. 밤새 마음이 아프고 외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다시 일상을 살아갔다. 일상을 살아가고 밤의 시간을 살아냈다. 그렇게 함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릴케의 시를 읽고 잊고 있던 수호천사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나의 천사를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천사는 나의 품속에서 가난해지고 작아졌다.
그리고 나는 커졌다.
어릴 적 나에게 그저 내 머리맡에서 잠든 나를 쳐다보는 귀신, 혹은 유령 같은 무서운 존재였던 수호천사. 어둠에 대한 무서움을 이겨내면서 내게서 자연스럽게 잊힌 그 존재는 분명 내 삶이 실체적인 것들로 풍요로워지는 동시에 점차 '가난해지고 작아졌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버리고, 정리하고, 줄이고, 그리고 아끼기 시작하며 어느새 나의 마음은 가난해지고 작아졌다. 삶에 여유가 사라지니 척박하고 퍽퍽해졌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누군가를 연민하고 동정하려는 마음, 누군가를 돌보고 바라보아주려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외면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커졌다. 나로 꽉 채워졌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나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갑자기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천사는 떨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연민의 감정이 느꼈다. 안타까웠다. 어딘가 깊숙이 파묻혀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의 떨리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는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뜨겁게 터져 나오려는 그 어떤 것의 울음을 간신히 삼켜낸 뒤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는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나는 물을 수 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다.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가슴이 꽉 막힌 듯, 마치 굉장히 무거운 어떤 것이 내 가슴을 꾸욱 꾸욱 누르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나는 손으로 가슴을 처음에는 쓰다듬다가 나중에는 툭툭 쳐보았다. 조금 나아지는 듯싶었다. 침대에 몸을 뉘이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쓴 다음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니 한바탕 울고 나서 그런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맑아져 있었다. 아직 늦은 오후의 게으른 햇살이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거실로 나와 따뜻한 물을 한잔 마신 뒤 잠들기 전 읽었던 릴케의 시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천사를 하늘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천사는 내 가까이에 그대로 있다.
천사는 떠다니는 것을 배웠고, 나는 삶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다시 눈물방울들이 또르르 또르르 뜨겁게 볼을 타고 흘러 무릎 위로 툭 툭 가볍고 차갑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동안 잊고 지내던 수호천사는 사실 항상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녔을까? 내가 그 존재를 완벽히 잊고 살아왔어도, 오로지 실체적인 것들을 쫓으며 어느새 가난해지고 작아진 내 마음이 밤마다 괴로움이 시달릴 때에도, 귀신이나 유령이 아닌 공허해지는 내 삶이 겁이나 두려워 차마 뒤돌아 보지 못했을 때에도, 수호천사는 내 가까이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문득 어릴 적 엄마의 기도가 떠올랐다. 엄마는 우리들의 수호천사에게 간절히 부탁하셨다. 우리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게 지켜달라고. 나는... 나는 과연 세상에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이나 했을까...? 그저 나 좋은 삶 살려고... 나만 더 잘 살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껏 나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 모든 순간들과 내가 놓친 그 모든 기회들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제야 제대로 삶을 배운다. 뒤늦게라도 삶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진정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누군가를 연민하고 동정하려는 마음, 누군가를 돌보고 바라보아주려는 시간.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렇게 함이 진정 더 좋은 삶을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수호천사가 존재한다는 엄마의 말씀을, 나는 믿는다. 그들이 항상 우리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괴롭고, 외롭고, 힘들고, 그리고 슬픈 순간들에도 우리와 함께 한다. 그 얼마나 짙고 어두운 밤의 시간에도 말없이 조용히 타오르는 작은 촛불처럼 우리와 함께 함을. 기억하자. 힘을 내자.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크고 아름답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일들과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함께 힘을 내어보자 다짐해본다.
커버 사진 출처: Photo by Luke Stackpool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