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듯 잔잔한 얼굴에서

마무리하며

by 이제은
<꿈을 꾸는 듯 잔잔한 얼굴에서>

꿈을 꾸는 듯 잔잔한 얼굴에서
순결한 영혼이 넘쳐흐를 때
사랑하는 그녀의 눈언저리에
빛이 가득한 한바다가 감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몸이 떨린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날 때
숨을 죽이고 발을 멈추는 어린아이처럼.

- < 릴케 시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중에서



릴케의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숨이 멎었다. 8줄의 짧은 시 속에 그의 삶이 담겨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한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의 시가,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이렇게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찌릿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강렬하고 짙은 여운이 맴돌았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아쉬운 마음에 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여러 번 되새겨 읽어보았다.


'꿈을 꾸는 듯한 잔잔한 얼굴에서

순결한 영혼이 넘쳐흐를 때'

릴케가 바라보던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얼굴은 내가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얼굴과 왠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곱게 잠든 얼굴에서 묻어나는 고결함은 마치 천사의 아름다운 하얀 깃털을 떠올리게 하며 휴식을 취하는 영혼에서는 잔잔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표정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은 그의 꿈을 꾸는 얼굴이 아닐까.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은 그런 얼굴.



'사랑하는 그녀의 눈언저리에

빛이 가득한 한바다가 감돈다. '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그 사람이 꾸는 꿈속을 상상해본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릴케가 상상했던 것처럼 빛이 가득한 매우 넓고 깊은 바다일까? 밤하늘에 별빛 가루가 뿌려진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일까? 샛소리와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초록이 우거진 시원한 숲 속일까?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나도 그곳으로 찾아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없이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몸이 떨린다.'

순간 내 마음은 거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올라 눈부시게 빛이 나기 시작한다. 주체할 수 없는 가득참으로 온몸이 떨려온다. 눈부신 빛은 곧 향기로운 꽃향기로 우리들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그 온화함에 내 안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투명한 눈물이 되어 녹아내린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남은 자리에는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만이 하염없이 빛나고 있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날 때

숨을 죽이고 발을 멈추는 어린아이처럼.'

사랑은 한 편의 시처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내 온 세상을 순간 멈추게 만든다. 마법처럼. 숨을 멎게 만든다. 사랑은 그 자체로 신비이다. 너는 알까? 내게 사랑을 가져다준 너 또한 내 세상 속 가장 큰 신비라는 것을.



꿈을 꾸는 듯 잔잔한 너의 얼굴은 아무 대답이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온히 잠든 너의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그래. 너의 잠든 얼굴을 볼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마음은 이미 사랑으로 충분히 가득 차 올랐음을. 네가 내 삶에 와줌으로써 나의 매일이 크리스마스처럼 축복이 되었음을.





글을 쓰면서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크리스마스에 받을 선물을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 못 이루던 밤들. 이젠 어른이 되어 그저 휴일 중 하루가 되어버린 크리스마스.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릴케의 시를 읽고 문득 떠올린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특히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공항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먼 한국에서부터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일하는 자식들을 만나러 오셨던 부모님. 벌써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좀처럼 도착 게이트로 나오지 않아서 일분일초를 걱정하며 동생과 함께 초조히 기다렸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연락이 되지 않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며 마침내 수많은 낯선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을 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날 때

숨을 죽이고 발을 멈추는 어린아이처럼.'


바로 그 순간이 나에겐 이 어린아이가 느꼈던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크리스마스트리에 화사한 불빛들이 가득 들어왔다.

나는 깨닫는다. 시는 이토록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것을.

오로지 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전율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릴케의 시를 읽으며 경험한 이 아름다움을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얼마나 황홀할까!


나는 꿈꾼다.

그리고 써 내려간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내일도.






커버 이미지 출처: Image by Mar Dai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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