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가벼운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가까운 공원까지 적당한 걸음으로 왕복 15분이 걸렸기 때문에 부담도 없었다. 거리에 나오자 가장 먼저 뜨거운 햇살이 나를 반겼다. 이젠 정말 여름인지 날씨가 꽤 더워졌다. 이 날씨에 산책을 하면 분명 어느 정도 땀이 나겠지만 그렇다고 산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핸드폰 타이머를 15분 맞춘 뒤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막상 걷기 시작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역시 산책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계단이나 언덕이 있는 곳으로 걸으며 최대한 몸을 풀어주려 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환자를 보다 보면 하체 근육을 거의 쓰지 않았다. 장시간 앉아서 근무하면 허리에도 무리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못해도 하루 한 번은 꼭 산책이나 스트레칭을 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산책은 즐겁고 재미가 있어서 꾸준히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책을 마친 뒤 공원에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내 바로 옆에는 어깨까지 오는 하얀 머리를 곱게 빗은 할머니도 한분 계셨다. 허리가 살짝 굽으신 할머니는 한 손에는 튼튼해 보이는 갈색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꽃문양이 예쁜 가방을 들고 계셨다. 특히 하늘색 파란 눈동자가 하얀 머리색과 어우러져 인상적이었다. '할머니께서 참 고우시고 정정하시네'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있던 횡단보도의 신호가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이곳은 한적한 구간이라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할머니께서는 가만히 게셨다. 나는 길을 건너려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호등과 거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호등 빛이 체 변하기도 전에 서둘러 길을 건너는 사람들. 다들 그렇게 바쁘게 어디론가 가는 것일까? 다들 각자의 시간에 맞춰 바삐 살아가는 것이겠지. 나도 그렇듯이.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와 함께 길을 건너는 사람들과 신호등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이글거렸다. 이윽고 나뭇잎 같은 예쁜 초록불이 들어왔고 조마조마하던 내 마음도 안정이 되었다. (역시 초록색은 언제나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주위를 둘러보시느라 미처 초록불을 보지 못한 듯 걸음을 떼지 않고 계속 서계셨다. 내가 먼저 횡단보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잡고 있던 갈색 지팡이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한걸음, 한걸음. 그녀가 걷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왜 그녀가 좀 전에 횡단보도 앞에서 왜 망설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네다섯 배정도 느리게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나도 한걸음 한걸음. 걷고 기다리고 걷고 기다리고.
그렇게 우리는 사이좋은 바닷거북 친구처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새파란 하늘과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여름 바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무사히 도보에 들어설 때까지 나는 하늘과 할머니와 신호등을 번갈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평소의 나에게 1분이라는 시간이 주워지면 나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게 1분이라는 시간은 메일이나 SNS를 확인하거나 웹툰이나 유튜브를 보기에도 다소 짧은 시간이다. 시간이라기보다는 순간에 더 가까운 그 시간을 나는 그동안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것 같다. 매일 바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시간이 주어졌을 때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어쩔 때는 그 자투리시간을 너무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이도 저도 못하고 스트레스만 받은 날도 많다. 그만큼 나는 시간에게 너무 무심하시도 너무 엄격하기고 했다. 시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비단 시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나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내가 사물을 대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은 다 나라는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1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1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니 “1분은 너무 짧아, 1분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거나 “빨리 뭐든 해내야 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내게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마치 옷장 속에 있던 코트 주머니에서 우연히 만 원짜리 지폐를 찾은 느낌이었다.
할머니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이렇듯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드디어 도보에 도착한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예쁜 하얀 안개꽃을 닮은 그 미소가 한 여름날 뜨거운 태양조차 함께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움직였다. 걷는 내내 마음에 안개꽃이 만개했다. 만개한 안개꽃들 사이로 또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엔 영혼에 기쁨을 주는 사소한 일들이 참 많다고. 오늘 산책 중에만도 내가 찾은 기쁨들을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싱싱한 나뭇잎들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코끼리같이 큰 나무들, 손자와 함께 나란히 잔디밭에 앉아 날쌘 다람쥐를 구경하는 할머니,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강아지가 신이 나 흔드는 꼬리를 바라보며 즐겁게 웃는 가족들, 그리고 할머니의 안개꽃을 닮은 따뜻하고 수줍은 미소. 이 모두가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다.
내 눈을 내 안에서 바깥으로 돌린다는 것은 내 관심을 나만이 아닌 내 주변을 향해 돌리는 것과 같다. 자칫 내 문제들로만 차있는 나만의 세상에 빠졌을 때 어쩌면 내게 필요한 동아줄은 단순한 산책일지도 모른다. 산책을 하며 나를 둘러싼 세상과 다시 연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잊고 있던 작은 것들이, 보이지 않던 당연한 것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숨어있던 별들처럼 빛을 발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들어내는 시간.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꼭 붙잡아 내 하루를 소중한 행복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내 마음이 행복으로 차오르면 그 행복은 나를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따듯한 손이 되어, 환한 미소가 되어, 그리고 친절한 말 한마디가 되어 아름답게 세상을 만드는 힘. 어쩌면 우리들의 행복은 이처럼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행복이 곧 누군가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1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생각보다 참 많다. 무엇을 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아닐까? 그에 따라 나의 태도가 변하고 나의 생각과 행동이 변하고 나아가 내 삶의 질이 변할 것이다. 나는 오늘 내게 횡단보도 앞에서 1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참 감사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 언제나 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시선만 돌리면 아침을 맞이하는 작은 참새들의 노랫소리 같은 행복을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찾기만 원한다면 우린 언제나 감사할 일들은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잊지 말고 (또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찾고 또 찾아보자. 나의 마음에 행복이 넘쳐 세상으로 퍼져 나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