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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24. 2023

꽃들의 속삭임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이해인>

오늘같이 쉬는 날에는 좋아하는 책을 한 권 들고 동네 공원에 간다. 집에서 편하게 읽어도 좋지만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공원에서 책을 읽으면 왠지 색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카페에서 사 온 부드러운 하얀 크림이 넉넉히 들어간 녹차 롤 케이크 한 조각과 따뜻한 재스민차가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재스민차의 은은한 향이 기분 좋게 입안에 퍼졌다. 쓰지도 달지도 않은 차의 맛은 보송보송한 케이크와 아주 잘 어우러졌다.


책도 실컷 읽고 케이크와 차도 잘 먹고 마신 뒤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제법 쌀쌀한 겨울의 마지막 바람결에 긴 머리카락들이 흩날렸다. 길가에 핀 큰 목련나무에 피어난 꽃들이 제각가 하얀 치맛자락이 흩날리며 아름다운 향기로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서서 바라본 나무에는 어여쁜 백목련 꽃들이 우아하게 피어 있었는데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바람도 의연하게 맞이하는 듯 보였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대로.


그러나 거센 바람결에 못 이긴 꽃잎들이 하나 둘 공중에 휘날리며 천천히 하강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요히 떨어진 꽃잎들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들이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속삭이는 듯했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대로 지나가게끔 놓아두라고.

세상일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때가 되면 피어나서 때가 되면 지는,

그저 조금 일찍 또는 조금 늦게 피었다 지는 목련처럼,

의연하게 꿋꿋이 살아가라고.

그렇게 산다면 적어도 아름다운 향기를 옆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들의 속삭임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어떤 장막에 막혀 버린 듯이 그 속삭임들은 흡수되지 않고 튕겨져 나가는 듯했다. 왜일까. 괜한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그렇게 서럽고 또 안타까웠던 것일까. 마치 불길이 한순간에 타올라 주변의 잔가지들을 모두 태워버리듯 감정들이 순식간에 내 마음을 점령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러움 혹은 안타까움에 젖어 서있는데 점점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더니 이내 어두워진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후둑후둑 후두두둑 쏟아졌다. 공원을 거닐던 사람들은 하나 둘 바쁜 걸음으로 저마다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고 심지어 다람쥐들과 참새들 마저도 금세 어디론가로 모두 숨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안의 격한 감정들에 사로잡혀 서있기만 했던 나도 서둘러 미리 챙겨 온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굵은 빗줄기들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비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눈앞에 꽃들이 활짝 핀 목련나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치의 자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센 바람을 상대로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작은 꽃봉오리들이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되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애처롭게 흔들리는 꽃봉오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한결 짙은 목련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윽하면서도 부드러운 목련의 향기는 마치 내 영혼을 꿰둟듯 나를 지나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분명 아까와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꽃의 향기를 맡은 것인데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곧 거센 바람은 시원하게 느껴졌고 쏟아지는 빗줄기의 소리는 평온하게 느껴졌다. 그 평온함 속에서 나는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책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이 떠올랐다.


“어느 땐 바로 가까이 피어 있는 꽃들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쪽에서 먼저 눈길을 주지 않으면 꽃들은 자주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곤 합니다. 내가 자주 오르내리는 우리 수녀원 언덕길의 천리향이 짙은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 오기에 깜짝 놀라 달려가서 아는 체했습니다.  "응, 그래 알았어. 미처 못 봐서 미안해. 올해도 같은 자리에 곱게 피어 주니 반갑고 고마워."라고.

좋은 냄새든, 역겨운 냄새든 사람들도 그 인품만큼의 향기를 풍깁니다.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 없이 고요한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는 꽃처럼 살 수 있다면, 이웃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향기를 전하며 한 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이해인산문집>

 

그제야 나는 비로소 꽃들의 속삭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공원의 한가운데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공원이 마치 나만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곧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장막이 걷히고 그 안은 그윽하고 부드러운 목련의 향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지금껏 애처롭게만 보이던 가녀린 꽃봉오리들이 이제는 씩씩하고 대견스럽게 보였다. 아, 나도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이 목련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내 마음부터 예쁘고 부드럽게 만들어야겠다. 언제든 고요한 향기로 말을 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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