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깊은 대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지구상의 위대한 국립공원>의 칠레 파타고니아편에서는 안데스 콘도르라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안데스 콘도르는 “날개폭이 최대 3.2m, 무게는 최대 15kg 정도까지 자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맹금류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새끼 안데스 콘도르가 처음 비행에 도전하는 장면이 나오며 버락 오바마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 새들은 너무 무거워서 날갯짓만으로는 날지 못합니다. 그래서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려면 바람 타는 법을 배워야 하죠. 부모는 따뜻한 상승기류와 공기의 흐름이 있는 곳으로 새끼를 이끕니다.” 나는 이 새끼 안데스 콘도르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의 부모와 함께 멋지게 비행하는 모습을 보며 아침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가끔 나는 내가 나의 생각들로 너무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내가 항상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나는 괴로움을 겪는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말했듯이 너무 주먹을 꽉 쥔 체 살아가고 있기에 겪는 어려움이다. 내가 이렇게 내 생각들로만, 나로만 가득 차 있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주 무거워진다. 몸도 마음도. 그러면 하나 둘 부정적인 생각들이 찾아오고 뒤따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찾아온다. 그러면 악순환의 시작이다.
이 악순환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제이 셰티가 <수도자처럼 생각하기>에서 조언한 대로 먼저 알아채고(감정이나 문제를 알아낸다), 멈추고(그게 뭔지 이해하기 위해 멈춘다), 바꿔야 한다 (새로운 처리 과정으로 바꾼다). 여기서 내 문제를 알아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그 이유는 단순히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 그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바꾸려는 마음을 먹는 것까지 포함한다.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굉장히 열린 마음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 첫 번째 단계를 마치 안데스 콘도르가 자신이 몸이 너무 무거워 날갯짓만으로는 날 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청이 <역행자>에서 말한 자의식 해체의 3 단계 (탐색, 인정, 전환) 중에 탐색과 인정의 단계와 같다.
안데스 콘도르는 스스로 나는 시도를 하며 날갯짓을 배운다. 하지만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려면 바람을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학교를 포함한 많은 교육기관과 책, 수업, 미디어를 통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우리가 직업을 갖고 세상을 살아다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문득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배우고 얻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이며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나의 이런 생각들과 물음들에 대해 부모님과 함께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버지와 나는 삶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만의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최근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온 삶의 의미를 찾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로고테러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빅터 프랭클>중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방식 중 세 번째인 시련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얘기했는데 그때 나는 프랭클의 다음 구절을 함께 나누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빅터 프랭클>중에서
솔직히 이것은 아직 서른이 조금 넘은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생각이었다. 나는 그 구절을 여러 번 읽어보며 이해하려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몫의 시련들을 이미 겪었다 생각했지만 한 번도 시련 그 자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시련이 닥치면 그 시련에 대처하고 또 시련에서 회복하느라 바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 마음은 항상 시련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고자 했다. 시련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며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기피대상이었다.
이런 나와 달리 아버지는 삶의 여러 굴곡들을 겪으시면서 시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 한편에 깊이 묻어놓았던 이야기들을 아주 솔직하고 담담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셨다. 그는 내 부모님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내게 들어내어 보여 주었다. 자신의 취약한 성향들과 과거 자신의 실수와 후회들마저도 스스럼없이 나와 공유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내가 사실은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 또한 용기를 내어 전에 쉽게 말하지 못했던 나의 취약한 성향들과 과거의 실수와 후회들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곤 내게 당신의 딸들이 당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본인이 겪었던 어려움들을 겪지 않고 더 빠른 시간 안에 행복해 지길 바라신다고 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내가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그래서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말들이 오늘은 내 심장을 관통했다. 마음이 아려왔고 눈물이 흘렀다. 원할 때마다 부모님과 대화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갑자기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서였는지 아니면 그동안 내 안에 숨겨놓았던 나의 부족한 면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뒤 느낀 일종의 해방감 때문이었는지 잘 몰랐다. 다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대화와 함께 방금 본 새끼 안데스 콘도르의 감동적인 첫 비행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부모는 새끼 콘도르가 스스로 날기 전까지 그에게 수도 없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새끼는 높고 푸른 하늘을 고고하고 우아하게 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날갯짓을 연습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아슬아슬하지만 첫 비행을 완수했다. 곧 그의 부모는 이제 막 나는 법을 배운 새끼를 따뜻한 상승기류와 공기의 흐름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며 그가 더 높이 그리고 멀리 날 수 있도록 바람을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안데스 콘도르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려면 바람을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오늘 아버지와의 깊은 내면의 대화를 통해 바람을 타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한 듯싶다. 전보다 조금은 더 시련을 기회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내 삶의 의미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갖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나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으로 하여금 나와 세상을 더 풍요롭게 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과 가르침, 혹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에너지는 대지와 태양을 포함한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에너지와 같다. 내가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가르침이 내 인생의 큰 의미를 차지하며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고산지대의 흙이 물을 저장해 놓았다가 아래쪽으로 흘려보내어 사시사철 풍요로운 물을 제공하듯이 나는 내 안에 사랑과 지혜를 저장해 놓고 언제든 내 영혼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적시도록 찾아 써야 할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