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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Jun 01. 2022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이야기

9." 별아 오늘 밤엔 꼭. "

2014.07.16


어제부터 시골에 와 있다. 영월 운학리. 아버지의 고향이라서 아주 어릴 때부터 집처럼 드나들었던 친숙하고 정겨운 곳이다. 네다섯 살 무렵엔 그곳에 살고 계시던 할머니께 맡겨져 지내기도 했다. 믿건 말건 나는 꽤 어릴 때의 기억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맡겨져 지낼 때의 운학은 나에게 많은 감각을 깨워주고 생명력을 준 항상 따뜻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아버지께도 마찬가지일 이 애정 어린 곳에 아버지는 예쁜 집하나 짓고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셨고,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에 드디어 공들여 집을 지으셨다.




이 집을 짓기 전에 자주 이곳으로 놀러 올 때엔 계속 이곳에서 살고 계신 고모할머니 댁에 자질구레한 신세를 져 가면서 물 앞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까지 내내 다른 곳에도 가더라도 꼭 한번 여름휴가는 이곳에서 보냈었다. 그리고 휴가라기엔 꽤 오래 지냈다. 아홉 살 여름에 갔을 때는 방학 시작하고 엄마 아빠와 들어가서 개학 때가 다 되어서 나왔다. 지내는 동안 낮에 아빤 고기를 잡고, 엄만 그곳에서도 살림을 하시고, 나는 물놀이를 하고. 오후엔 엄마 아빤 키가 큰 물풀 그늘 밑에 둥둥 튜브를 띄워 낮잠을 주무셨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떠나며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야영지에 덩그러니 놓인 우리가 지냈던 ‘집’을 걷을 때 너무 신기하게도 텐트 바닥 모양만큼만 숙주나물 같은 것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그늘 밑인데 오랫동안 뜨뜻하니 고운 흙에 새싹이 튼 모양이었다. 정리해 싸 놓은 살림만 큰 빨간 고무통에 한가득 이었다. 그때 우리는 자가용도 없어 남의 차를 빌려 타 오고 가고 하는 것도 꽤나 벅찬 일이라 짐 싸고 풀 때 엄마 아빠 싸우시는 모습도 꼭 보게 되었지만, 와 있는 동안은 항상 즐거웠었던 추억이다. 열 살 여름은 그곳에서 작은언니와 단둘이 지냈다. 아버지께서 데려다 놓고 가신 첫날부터 자고 있는데 폭우가 내려 텐트 안에 물이 들어찼다. 작은언니와 나는 살림을 거두고 텐트를 뒤집고 말리며 다시 스티로폼과 비닐과 박스를 주워와 든든하게 자리를 손보았다. 밥은 앞에서 야영지 천막 장사를 하시던 고모할머니께서 바쁘신 와중에 거르지 않고 챙겨주셨다. 두 살 많은 언니가 살림도 하고 나를 보살피던 솜씨는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언니를 많이 무서워했을 땐데 단둘이 지내느라 긴장도 많이 하던 중에 휴가로 놀다 가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놀고 헤어지며 즐겁기도 했다. 어르신께서 가장 중요한 밥을 주시며 돌보아 주시긴 했지만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생활해야 하는 낯선 느낌이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자유롭고 더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운학은 매년 어떤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기대하게 하였고, 몸도 마음도 튼튼하게 해 주고, 기대만큼 값진 소중한 추억들을 어린 날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이곳의 흙길도 모두 포장되어 새 길이 나고, 길 따라 집들도 좀 들어오고, 아빠의 집도 그 길 한편에 들어섰다. 이렇게 집다운 집에서 지내며 예전과 다르게 편하게 즐기며 보낼 수 있는 지금인데 뭔가가 어색한 느낌이다. 조금 변하기는 했어도 푸근한 산이며 쨍쨍한 햇살, 시원한 공기와 바람, 물소리, 풀내음은 그대로인데. 지난 기억들과 추억들을 자연스레 곱씹으며 이곳으로 들어오지만 하루라도 지나고 나면 그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자연스러웠던, 항상 그리 지냈던 일들은 이제 추억이고 전혀 새로운 방식의 생활을 추억의 장소에서 하고 있는 것 같다.

들어온 어제부터 소소한 일들을 하고 있다. 하루 시작엔 창들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내 먹을 밥상을 차리고. 쓰레기 처리가 난감해 음식물 쓰레기 안 나게 고심을 하다 보니 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잡초 뽑는 아버지께 참을 나르고. 벌집이 발견되어 태운 것을 오늘 쓸어냈다. 땀에 전 작은 옷가지들을 비비고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는 항상 조금씩 조금씩 쌓여있어 없어지는 법이 없다. 내 집에서 하던 일들을 여기서도 하게 되니 뭔가 예전의 그 신나던 시골에 왔다는 기분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가까운데도 거의 물가엔 나가지 않게 된다. 예전의 그 추억들은 지금보다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지 않았지만 시간 여유야 어느 때보다 많았을 때에 있었던 에피소드일 것이다. 부족한 것들이 많은 추억을 담을 틈바구니를 만들었고 정말이지 즐겁게 그 틈을 꼭꼭 채웠다. 지금의 이곳에서도 그때와 또 다르게 만들어질 소중한 감정과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음. 이곳에서는 누워서 별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다. 꼭 해보고 싶던 것인데. 예전엔 다리 위에서 벌렁 누워서 한참 보다가 들어가 자야 하는 게 아쉬웠었다. 어제는 흐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꼭 별을 보면서 잠들었으면 좋겠다.      

[출처] 9. 나무늘보 여인의 작은 얘기 - " 별아 오늘 밤엔 꼭. "|작성자 onlyweek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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