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는 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갈색 나무식탁 위 하얗고 따듯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오랜만에 오붓한 식사를 했다.
“많이 피곤했니?”
하라가 그에게 물었다.
“그랬나 봐요."
그의 대답과 함께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어머니, 할 말이 있는대..."
그의 속삭임이 적막을 깼다.
“응? 뭔데?"
“사직서 냈어요.”
“뭐라고?"
하라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며 말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요.”
하라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준서가 끼어들었다.
“왜 그랬니?”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화를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냥 좀 쉬고 싶다니까요.”
그도 슬슬 짜증이나기 시작했다.
“똑바로 말 안 해? 알아듣게 얘기해. 너 그 회사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근데 쉬고 싶다는 게 말이 돼?”
준서의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을 쉬었잖아요.”
순간 그는 하면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너… 그게 무슨 말”
“그만해 둘 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하라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낮에 입었던 옷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그가 없는 식탁에 둘만 남겨졌다.
“여보, 왜 그래? “
하라가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뭐? “
하라의 한숨소리가 텅 빈 부엌에 울려 퍼졌다.
그는 집으로 한참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 3시가 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불은 모두 꺼져있었지만 달빛에 비친 식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식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식기들과 아련한 분위기까지. 하지만 식탁 위 딱딱하게 굳어있는 김칫국물이 깨끗해 보이는 그들의 관계 속 미쳐 지워지지 않은, 어쩌면 이미 생기고 있던 균열을, 불완전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동안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하라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준서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단 둘이 집에 있기가 힘들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하루는 집 앞 공원, 또 하루는 도서관, 또 하루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루프탑 카페에서 친구와 잡담을 나누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할 때면 사방이 시원하게 뚫린 곳에서 오랜 시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카페에 도착해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혁은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하나뿐인 영특한 친구였다.
“먼저 와있었네.”
준혁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 왔어?”
“너 뭐 할 말 있어서 부른 거지?"
“아니야, 그냥 수다나 떨까 해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음 뭔 일 있구나.”
그와 준혁은 어릴 적부터 친했기 때문에 준혁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실 회사 관뒀어.”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군.”
준혁도 덤덤하게 말했다.
“왜 안 놀래?”
“우리 나이대가 다 그럴 때지. 네 주변에도 많아 그런 애들.”
“아... 그렇긴 하지.”
그가 머쓱하다는 듯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너무 지친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 여행이나 다녀와보는 건 어때?"
“돈이 어딨다고."
“모아둔 돈 없어?"
“있긴 하지. 그런데 얼마 안돼."
"먹고살지 힘들지. 취업에 결혼에 어디 마음대로 여행도 못 가고."
그들은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를 바라보았다. 남산타워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건물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그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는 준혁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흘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집 앞 공원을 지나고 있을 때 그는 공원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옆으로 회색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 자동차는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더니 차를 세웠다. 잠시 뒤, 조수석에서 어떤 여자가 내렸다. 그는 별생각 없이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하라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왜 낯선 차에서 내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라는 조수석 창문을 통해 낯선 남자와 얘기를 하더니 낯선 남자도 차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보지 말았어야 할 장면을 그는 보고 말았다. 그에게만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던 어머니가 그 낯선 남자와 작은 고민 하나 없어 보이는 깨끗한 웃음을 지으며 입맞춤을 나누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자신이 알던 어머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 웃음을 잃은 어머니는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는 집 앞에서 서성이며 고민을 했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고, 결국 그는 방향을 틀어 준혁의 집으로 향했다. 언제 오냐는 어머니의 문자와 전화를 무시한 채 그는 계속 걸었다.
“준혁아 문 좀 열어줘.”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 준혁은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끔 놀러 가곤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다행히 준혁은 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준혁이 문을 열자마자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는 변기뚜껑을 열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깜짝 놀라 그가 고통스럽게 구토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준혁이 깜짝 놀라머 말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말을 해봐.”
준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그는 화장실 문을 세게 닫았다. 화장실에서는 그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준혁이 다시 문을 두드리러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가 조금은 진정된 모습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속 안에 역겨움들을 뱉어내느라 힘을 모조리 써버려서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그가 힘없이 걸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준혁은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몇 분 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숨이 안 쉬어져. 준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