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터널

9.

by 우산

햇볕이 내려쬐기 전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 끈끈한 사이가 되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조금씩 작은 희망으로 변해갔다.

뛰는 순간만큼은 부정적인 생각들은 잊고 온전히 뛰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기 싫은 날이 있어도 그들이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루는 1km, 그다음 날은 1.5km 또 다음날은 2km, 늘어나는 거리만큼 서로를 향한 믿음도 커져갔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뛰고 있던 준서가 그에게 물었다.

“찬솔아, 그런데 갑자기 직장은 왜 관둔 거니?”

준서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말하자 그가 뛰다 말고 멈춰 섰다.

“뭐야? 갑자기 왜 멈춰?”

그것도 모르고 뛰고 있던 준서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가 무릎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궁금하지 넌 내 아들이잖아.”

"그냥 지쳤어요."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잘 다니던 직장을 관뒀다고?”

아버지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준서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지금은 좀 쉬고 싶어요."

“그래, 알겠다.”

그들은 다시 달렸다.

준서는 그의 대답이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쌓아왔던 노력들이 무너져 내릴까 두려워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늘 처음으로 5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했고, 아까 했던 현실적인 얘기들은 뒤로한 채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그가 땀으로 흥건한 운동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식탁에 웬 편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편지에는 하라 특유의 흘려 쓰는듯한 서체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는 아버지께 먼저 씻으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서의 준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처럼 생활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준서에게 혼자서 씻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뜯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간단명료하게 한 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로 쓰여있었다. 그는 편지를 읽자마자 자신이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 한동안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아버지 상시로 챙겨주렴. 미안하다 아들아.

하라의 막대한 짐이 그에게 옮겨간 순간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편지만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낯선 남자와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로 떠났을 거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준서가 다 씻은 듯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갔다.

“다 씻었어요?”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너 씻어라.”

준서는 방으로 들어갔고, 그도 아까 흘린 땀을 씻어내려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얼음장 같은 물로 머리부터 적셨다. 차가운 물이 머리에 닿자 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그러다 조금 견딜만해진 그는 어머니의 편지가 생각났다. 하라는 최근 들어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읽기 전부터 극도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어머니의 외도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외면하고 다른 남자와 집을 떠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비밀이 하나 더 생긴 것이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건지 심각한 고민을 하며 한참 동안 샤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아버지의 상태를 호전시키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결국 하라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가 어머니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더운 날씨에 요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10분 전에 차가운 물로 씻었지만 또다시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가며 인터넷 레시피를 보면서 성심성의껏 칼질을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네 엄마 오늘도 집에 안 들어온대?”

준서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네? 몰라요. 연락 안 왔어요.”

그는 순간 당황했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남자 생긴 거지?"

준서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버지.”

“넌 알고 있잖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까지 나를 속이지 마.”

준서의 말에는 그 안에는 슬픔, 배신감, 괴로움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지만 준서의 표정과 차분한 목소리는 내면의 감정들을 잠재웠다.

“사실은 오전에 식탁에 편지 하나가 덩그러니 있길래 읽어봤더니…”

그가 진실을 말하기 주저하자 준서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뭔데 그게?”

준서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말대로 한동안 어딘가로 떠난다고 쓰여있었어요.”

그의 충격적인 말에 준서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한 발 이제는 세상의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준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

그가 소리치며 달려갔다. 아버지를 붙들고 계속 외쳤지만 준서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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