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날 밤,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그리움 때문도 아니고, 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가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느꼈으면 했다.
어젯밤, 한 생명이 세상을 떠날 뻔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 본 어머니의 미소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밝고, 깨끗했다. 미움, 원망,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무해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그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는 떠나버린 어머니를 찾지 않으리라 되뇌고, 들었던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내 내려놓았던 휴대전화를 집어 어머니에게 문자 한 통을 남긴 다음 다시 책상 위에 엎어두었다.
그들은 나비가 탈피를 하듯 세상밖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살이 붙고, 낯빛이 밝아지더니 어둡고 예민했던 성격과 자신도 모르게 툭툭 내뱉던 가시 박힌 말들도 둥글고 유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루가 달리 눈에 띄게 변화하는 모습들이 낯설기만 했다.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서로의 믿음과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강한 끌림이 있었고, 그 끌림은 그들을 밝은 세상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하라의 빈자리는 갈망과 열망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집 안 곳곳에는 남아있는 하라의 잔향과 잔상들이 그의 앞을 아른아른거렸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만 같은, 어딘가에는 있지만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는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와 중후한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그의 모습은 진중하며 무언가 비감에 잠겨있는 것 같은, 하지만 한이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 모순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의 변모에 맞춰 준서의 검은 머리사이사이에서 미묘한 흰색의 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흰머리와 축 쳐진 피부와 눈매, 진해지는 주름들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야기했다. 다행히 매일같이 그와 공원을 달렸기 때문인지 환갑의 나이에도 군살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를 갖추고 있었다. 준서는 더 이상 수면제에 의지하지 않았고, 그는 꾸준히 항우울증 약을 복용한 덕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번듯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라는 사라졌지만 그들은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어두운 존재들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쳐봐도 그것들은 그들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는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눈에 보이는 대로 이력서를 넣고 있었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로 한통에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덮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싸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그가 물었다.
“…”
하지만 그의 물음에도 수화기 너머로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하라 아드님 되시나요?”
이름 모를 한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요?”
“이럴 수가”
낯선 남자의 탄식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잠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누구신데요?”
“만나서 다 말씀드리겠습니다.”남자가 말했다. “문자 드리겠습니다.”
의문에 남자는 문자를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그는 남자에게 시간과 장소가 적힌 문자를 받았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그는 저녁밥을 차려놓고, 아버지께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전했다. 그는 저녁밥을 차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 신발을 신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한 카페로 향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비구름과 불안감이 저 멀리서 몰려오고 있었다.
카페에 거의 다 다르자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와의 대화를 하고 나서 드는 의문들은 평온했던 그의 내면을 헝클어트리기 충분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많았지만 왜 남자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왔는지, 어머니와 어떤 사이인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졌다. 그는 남자에 대해 생각할수록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은, 어쩌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면 이유가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강한 확신에 이끌려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페에 도착해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니 3층까지 이어지는 계단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를 반겼다. 그는 카페에 들어서기 전 남자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남겼고, 곧바로 연락이 왔다. ‘2층 구석자리에 녹색 니트를 입고 앉아있습니다.’ 그는 커플들과 가족들로 만석이 된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빈자리가 곳곳에 보였다. 그는 녹색 니트를 입은 남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 멀리 창가 쪽에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한눈에 봐도 방금 전 메시지를 주고받은 그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도시적인 느낌에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턱선, 그와 같은 가르마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남자의 외적인 모습들이 방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듣던 목소리와 잘 아우러졌다.
그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남자의 압도적인 분위기가 그를 놀람과 동시에 위축되게 만들었다. 전직 운동선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람한 남자의 팔에 그는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남자는 그의 인기척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일어서서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형식적인 악수, 그는 이 모든 게 불편하기만 했다.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그는 남자의 첫마디를 들으니 어젯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기억났다. 이 남자가 확실했다.
그도 반갑다는 말을 건네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뭐라도 마실래요?”
잠시 뒤, 남자가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는 긴장을 한 탓인지 목이 매우 말랐지만 남자의 손에 든 커피보다 얼굴에 눈이 갔다. 가까이서 보니 뼛속까지 전해져 오는 위압감. 그것은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져 나오는 위압감이었다. 남자의 진한 팔자주름은 그가 남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저희 어머니랑 어떤 사이시죠?”
그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음… 말하자면 길지만 짧게 말씀드리자면 당신 어머니랑은 연인사이입니다.”
“네?”
그는 황당했다. 그의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처음 보는 남자가 어머니의 남자친구라고 돌연 고백을 한 것이다.
“연인사이라뇨?”
“갑작스럽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황스럽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어떤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집 앞, 회색 차, 그리고 잊히지 않는 키스.
“어제 우연히 하라의 폰을 봤습니다."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폰에는 문자 하나가 와있더군요. 그런데 보낸 사람이 아들… 이더군요. 저는 하라에게 아들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라는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다고 저에게 말해왔어요. 저는 그 말을 믿었죠.”
“어머니가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요?”
그는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어머니가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도 처음 문자를 보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잘못 본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지만 하라가 자고 있을 때 몰래 하라의 폰을 열어 당신 전화번호를 외워 제 폰으로 전화를 건 겁니다. 확인해보고 싶어서…”
“뭘 확인하고 싶다는 거죠?”
“진짜 아들이 맞는지… 아니길 바랐는데…”
남자는 꼬았던 다리를 풀어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 어머니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죠?”
“저야 모르죠.”
남자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가 또 모르는 이야기가 있나요?”
남자는 불안한 목소리로 다리를 덜덜 떨며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주세요.”
그는 진실을 말하기 주저했다. 좌절감에 휩쓸린 남자의 모습을 보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차차 말씀드릴게요. 그것보다 어머니는 어디 있어요?”
“지금쯤이면 저희 집에 있을 거예요.”
“지금 가봐도 돼요? 어머니를 꼭 만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