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긍정적이고, 나는 부정적이다.
아내는 즉흥적이고, 나는 계획적이다.
아내는 행복을, 나는 효율을 추구한다.
아내는 귀여움에, 나는 똑똑함에 끌린다.
우린 너무나도 다른 인간이다.
간혹 어떻게 만나고 살아가는지 신기하다.
무튼 그런 우리이기에 육아관도 달랐다.
당근과 채찍,
우리의 육아관은 단 두 단어로 정리된다.
아내는 당근파다.
우선 담이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다.
모성애와 귀여움에 대한 숭배로,
아내는 담이를 신봉하게 됐다.
담이는 미성숙한 존재다.
무조건적인 헌신이 필요하단게 아내의 생각이다.
나는 채찍파다.
아직 어리지만 알 건 안다고 본다.
성인처럼 대해선 안 되겠지만,
적어도 동물보단 영특해야 한다.
모든 응석을 받아주는 게 답은 아니라 생각한다.
귀여움에 무관심해서 그런지,
나의 방향에 감정이 제동을 거는 경우도 드물다.
안는 빈도, 토닥임의 강도, 마주하는 표정 등
담이를 대하는 태도는 꽤 많이 달랐다.
소소한 다툼을 피할 순 없었다.
어느 날 소소하지 않은 다툼이 발생했다.
그날따라 담이는 칭얼거렸다.
원더윅스라 몸이 아픈 건가? 이유는 정확치 않다.
눕혀서 열심히 토닥여 본다.
실패다.
앉아서 열심히 토닥여 본다.
또 실패다.
토닥거림의 강도를 올려 본다.
성공이다.
그렇게 나는 담이를 토닥였다.
아내가 싫어할 만한 강도로.
담이의 울음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날 문제는 발생한다.
담이의 목이 다시 기울어 있다.
주 2회의 병원치료, 집에서의 스트레칭.
우리는, 아니 특히 아내는 사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랬기에 아내의 충격은 컸다.
병원에 간다.
의사는 말한다.
흔한 일이라고.
아기는 성장속도가 워낙 빠르기에
증상은 완화되기도 강화되기도 한단다.
의사의 말에 안심하며 우린 돌아온다.
하지만 머릿속엔 전날 밤의 일이 맴돈다.
사경의 원인은 내 채찍이 아니었을까?
죄책감이 찾아온다.
채찍은 양날의 검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 성장의 발판이 되지만,
선을 넘으면 트라우마로 변질된다.
"어제의 나는 선을 넘었는가 넘지 않았는가?"
알 수 없다.
담이는 울음 하나로 나와 소통한다.
울음으로 이를 판가름하기란 쉽지 않다.
내 채찍이 가져온 파장을 알 수 없다.
불확실성을 굳이 감내할 필요가 있을까?
자식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고 싶은 부모가 어딨겠는가?
나는 천천히 나의 채찍을 집어넣는다.
대신 누워서 우는 담이를 둘러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