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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강 Jan 10. 2023

산낙지 論

광고 크리에이터 교본 35.

꼬물거리는 산낙지는 산 것이냐 죽은 것이냐?


토막이 난 채 접시에 담겨 꼬물거리는 산낙지는 기이한 존재다. 산낙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이 <꼬물거림>을 과연 살아있는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이념(클레임)이 지성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감성에 현시(스타일) 할 수 있을까?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다 '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하다.


가히 감성의 전성시대이다. 이 바닥에서는 누구나 <감각적>이라는 말을 코에 걸고 산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감성>이란 것이 고작 그 꼬물거리는 산낙지의 움직임 같은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서글픈 이야기다. 순간적인 쾌감이라는 전극에 그것을 제공하는 상품을 연결하는 것이 겨우 우리의 일이라면 허망한 일이다. 더구나 감성을 향한 거의 맹목적인 갈망에도 불구하고 좋은 감성교육을 받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세대의 그야말로 말초적인 감성 체계를 핑계 삼기라도 한다면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미래는 암담해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흔히 이렇게 얘기한다. 애들은 그런 걸 좋아해. 그렇게 해야 먹혀, MZ는 원래가 그래. 좋아하는 걸 주는 게 광고 아니야? 많은 20대에게 감성의 표현은 순간적인 소비와 동일시되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어디 갔더니 좋더라, 뭘 먹었더니 맛있더라. 별그램의 피드가 다 그거 아닌가, 왔노라, 먹었노라, 입었노라.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다. 우리가 언제 다른 걸 한 번 줘 보기나 했는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과연 그거라고 확신하는가?


상품과 인간의 진정한 교감이란 단순한 소비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비의 이면에 담긴 인간적인 배경, 그저 어떤 곳을 갔다라거나 무언가를 산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생활과 사고의 변화까지 아우르는 무엇. 소통과 교감은 그렇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소비자의 현재 좌표를 교조로 아는 한 크리에이티브는 언제나 반보(半步) 뒤진다. 지금은 당장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속 어딘가에는 분명히 들어있을 미래의 감성을 가져다준다면 크리에이티브는 정확히 반보를 선행한다. 트렌드는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이 좀 더 복잡해진다.


광고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안다. 이 바닥을 지배하는 감성이 딱 그 수준에서 소비 대중을 마중하길 원하겠지만, 적어도 감성을 모토로 하는 바닥이라면 일단 그 수준이라는 것부터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광고라는 게 남과 달라야 하는 것이 본분이라면 감성의 차원부터 남과 달라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더 높은 수준의 감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좀 더 많은 수준의 지성의 개입을 요구한다. 우리 이제 <좀 더 지성적인 산낙지의 감각>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더 이상은 <감각적>이라는 말이 <그냥 보기 좋은>이나 <아무 생각 또는 이유 없는>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닌 세상을 만들어 보자, 이 바닥에서도. 감각 너무 좋아하지 마라. 빈곤한 철학의 반증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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