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렇게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곧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게 나는 두 달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뇌하수체 종양입니다"
2003년 1월 말경, 대구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대학병원 신경외과의 담당의사는 내게 그 한 마디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판정을 내렸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두통으로 병원에 가 보려고 맘먹은 건 회사를 옮기고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다.
전에 다니던 직장이 영천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내 의지 하고는 상관없이 경산으로 직장을 옮겼다.
직장 옮기고 일 년이 돼 가니 업무도 손에 익고 사장님도 만족해하시는 듯 해 나름 기분이 한껏 업 돼 있었다.
그렇지만 뇌종양 수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냈다.
아홉 수를 조심하라 했던가? 정확히 서른아홉에 내 인생의 큰 기로에 섰다.
MRI를 찍으려고 고등학교 선배가 방사선 기사로 있는 병원에 들렀다.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괜찮을 거라며, 별거 아닐 거라며 위로 섞인 인사를 하던 선배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일이 잘못돼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대학병원 신경외과에서 뇌하수체 종양 판정을 받은 것이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하늘이 노랗다 못해 깜깜했다. 왜 내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는지 하늘을 원망하며 스스로 자책했다, 아내도 많이 놀랐을 텐데 애써 태연한 척 괜찮다며 나를 위로했다.
수술 병원으로 대구의 그 병원을 선택한 건 그곳에도 뇌 수술의 명의 교수가 있어서였다.
내 담당의사인 L교수는 비쩍 마른 몸의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의대 입시 때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떠 돌고 있었다.
입원 날짜와 수술 일정을 잡고, 집에 오자마자 하루 종일 인터넷에 매달려 '뇌하수체 종양'에 대해서 검색했다.
어떻게 수술하며, 예후는 어떻고, 어느 병원이 수술을 잘하고, 수술 잘하는 명의는 누구인지 뇌하수체 종양의 모든 것을 검색하고 나중에는 뇌하수체 종양에 대해 술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여러 번 탐독했다.
운명의 수술 날이 도래했다.
다행히 수술은 뇌를 열지 않고 콧속으로 접근해서 미세 현미경으로 종양을 제거하는 '경 접형동 수술법' 선택했다고 L교수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는 아내의 손은 많이 떨렸다.
특히 '수술 중 사고로 사망할 수도 있다' 문구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그건 형식상 쓰는 거라며 에둘러 말하고 수술 동의서 작성을 종용했다.
수술용 침대에 누워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마음이 편했다.
아내는 수술실 입구까지 이동하는 동안 잠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스러움을 털어 내려는 듯 '파이팅'을 외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수술실 안은 많이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주사기로 마취제를 넣는 듯했고 인공호흡기가 얼굴로 다가오는 듯하더니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악몽을 꾸었다.
전쟁터였다. 많은 군인들이 진흙 속에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앞에서 쓰러지면 죽은 전우를 넘어서 또 앞으로 전진하는 끝없는 전투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계속되었다.
5시간이 넘는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머물다 다시 입원실로 이동했고 나는 비몽사몽 자다 깼다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단지 내가 의식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붕대를 풀었다.
뇌하수체 종양 수술은 길어야 보름 정도 입원하면 퇴원한다는 정보를 인터넷으로 확인한 터라 조바심 내지 않고 주는 밥이나 챙겨 먹고 시간만 보내면 되겠지 생각했다.
큰 딸이 보고 싶었다. 이제 여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던 딸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장모님이 큰 딸을 데리고 오셨다. 병실 입구에서 나를 본 딸애는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장모님 품으로 달려가 서럽게 울었다. 나는 그때 왜 딸아이가 우는지 몰랐다.
딸아이가 돌아가고 나서야 내 얼굴이 피멍으로 엉망진창이라는 걸 알았다
10일쯤 지나서 변비가 생겼다. 수술 후 한 번도 화장실을 못 갔다. 그때 L교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수술 후에는 절대 몸에 힘을 주면 안 됩니다. 뇌척수액이 새면 재수술해야 합니다'
변비약에 관장까지 했지만 나의 꽉 막힌 대장의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막힌 변 덩어리를 빼겠다며 화장실에 앉아 땀이 삐질삐질 나도록 한껏 힘을 쓰고 말았다.
다음 날 새벽, 잠결에 코 끝이 축축한 듯해 일어나 보니 코에서 한 방울씩 맑은 물이 떨어졌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뇌 척수액이 수술부위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재수술은 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었고 나는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 수술 후 세균 감염으로 인해 뇌수막염이 찾아왔다. 체온이 매일 섭씨 40도를 넘나 들었다.
며칠에 한 번씩 척추뼈에 굵은 바늘을 박아 척수액을 빼내 세균 검사를 하고 독한 항생제를 먹었다.
고열로 인해 나는 매일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중간중간 끊어진 필름처럼 남아 있다.
입원 기간이 한 달을 훌쩍 넘은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당직근무 중인 L교수를 찾아가 '제발 우리 신랑 좀 살려 달라'며 애원했고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나를 데려 오라 했다.
아내는 나를 휠체어에 태워 의국에 있던 L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L교수는 작정한 듯 항생제를 섞어서 써 보자고 제안했다.
항생제 처방을 바꾸고 며칠 지나자 신기하게도 열이 떨어졌다. 뇌척수액 검사에서 백혈구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L교수는 백혈구 숫자가 다섯 개 내로 줄어야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뇌척수액 검사 후 백혈구의 숫자였다.
뇌척수액 검사의 고통은 더 이상 내게 괴로움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 맘속에서 서서히 새로운 삶의 불꽃이 타올랐다
입원 두 달째를 일주일쯤 앞두고 백혈구 숫자가 5개 이하로 줄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의 기분은 로또 맞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병원에서 빈둥거리다 퇴원했다.
퇴원 후 1년간 쉬고 직장에 복귀했다.
물론 호르몬제와 몇 가지 약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하지만
사지에서 돌아온 느낌이다.
오늘도 집 근처 앞산을 찾아 땀을 흘리고 왔다.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그 두 달간의 병원생활에서 얻은 값진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