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 노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걱정이 많아진다"
그렇다. 나는 최근에 노인의 행동에 대한 정의를 혼자 내리고야 말았다.
위의 명제에는 오류가 있다.
엄마라는 예외가 있다. 엄마는 변화를 원했고 최소한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않으셨다.
노인이 아니라 남자 노인이라 해야 맞다. 그 비근한 예는 아버지와 장인어른이다.
아버지의 걱정과 근심은 이사 오기 전부터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내게 본격적으로 와닿은 건 부산을 떠나 청도로 오기로 결정한 그날 이후부터다.
"이사 가려면 부산에 벌려 놓은 세간살이는 다 어떡하느냐부터 시작해서, 화분은 어디다 갖다 버릴 거냐, 다니던 교회는 어떡하느냐..."
아버지의 근심은 화수분처럼 끝없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우리 형제가 모든 걱정거리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드려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내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가장이었고 내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전세가 역전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빌면 당신은 나를 겁내고 두려워하신단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늙어 간다는 게 사람을 이렇게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변하게 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난다.
장인어른의 걱정도 아버지의 그것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만만치 않다. 오래전에 장인어른이 아파트로 이사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도 걱정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장모님의 반대에도 그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아파트행을 결심하셨다.
주택에 살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건축 하자의 발생과 보수에 대해 걱정하시다 결국 아파트를 선택하셨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공통된 걱정거리도 있다.
두 분은 건강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사신다. 조금 과장하면 부산에 계실 때 아버지는 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셨다.
몸에 조금만 이상 징후가 있어도 병원을 찾으셨다.
절대 진득하게 참거나 대수롭게 여기시는 법이 없었다.
반면 엄마는 여간 아파서는 절대 약을 찾지 않으신다.
그러고 보면 엄마와 장모님은 진정 강하신 분들이다. 걱정은 남의 일이고 절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하시는 분들이 아니다.
부모님이 청도로 이사 오신 지 한 달이 흘렀다.
아버지는 청도로 오신 후 한동안 불만 가득하신 표정이셨다. 그리고 나의 주도로 우리 형제가 벌인 청도 이사 프로젝트에 대해 많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밝아지고 편해 보이더니, 마침내 만면에 웃음 띤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어머니도 부산에 계실 때는 말수도 적고 활동영역이 집 주변이었는데 이사 후에는 말씀도 많아지시고 밭일도 하시며 아버지와 매일 청도천 산책도 다니신다.
아버지의 미소가 돌아온 결정적 계기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옆집에 사는 세 살 위의 아저씨는 이사 오던 날 찾아오셔서 아버지께 '우리 친구 합시다'하시더니 그 후 매일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귀찮게 하시고 있다.
옆집 아주머니도 어머니께 '이사 와서 너무 좋습니다'하시며 어머니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게다가 나는 매주 본가에 갈 때 장인어른을 모시고 간다.
아버지와 장인어른, 그리고 옆집 아저씨 이렇게 세 분은 이제 절친이다
어제저녁에 우리 부부는 부모님과 장인어른, 옆집 아저씨 부부를 모두 모시고 한우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사드렸다.
어쩌면 아버지, 어머니께 웃음을 찾아 주신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고 앞으로 부모님과 잘 지내 주십사 하는 부탁의 자리였다.
걱정 많은 어르신들께서 이제는 친구가 되어 즐겁게 보내시면 걱정도 많이 줄어들거라 믿는다.
절친에서 더 나아가 깐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