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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소회

by 석담

비가 내린다.

얼마 만에 내리는 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찍이 비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재작년 여름 한 달 넘게 계속되던 지루한 장맛비에 무심한 하늘에 얼마나 무지막지한 악담을 그 여름의 폭우에 퍼부었던가?


어제 산행길에 보았던 바싹 마른 낙엽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풀 날리던 흙먼지의 기억은 오랫동안 비에 목마른 대지의 아우성처럼 내 귓가에 메아리쳤다.

오늘부터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몇 번이나 날씨 앱을 들락거리게 했던가?


울진과 삼척, 그리고 내가 사는 대구 근교의 가창 산불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날 계속되었다.

많은 숲이 연기 속에 사라져 갔고 집과 삶의 터전을 불길 속에 잃어버린 수많은 이재민의 슬픔을 보았다.


비 그친 강가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겠다고 노래한 정지상의 시처럼 비 그친 산야를 바라보는 이재민들의 가슴속에는 이 봄비가 서러운 봄비는 아닐는지.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규칙적인 울림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호세 펠리시아노 노래 Rain 보다 더 훌륭한 음악으로, 그리고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의 궤적은 그 어떤 미술가의 그림보다 뛰어난 명작처럼 와닿는다.


누가 비 내리는 날은 우울하다 했는가?

비 오는 하늘은 회색 빛으로, 비 내리는 날은 블루하고 멜랑꼴리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늘의 이 비는 더 이상 우울하고 슬프지 않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깨우고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희망의 봄비다. 어제 심은 대파 모종은 봄비를 듬뿍 맞아 파릇한 잎사귀들이 생기를 찾았다.

지난겨울 가뭄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메말라 있던 밭의 흙은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대추나무와 자두나무 가지도 곧 새 잎을 보여줄 듯이 생기를 되찾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비를 소재로 한 노래를 즐겨 듣고 자주 불렀다.

호세 페리 시아노의 Rain과 B. J. 토머스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가 그것들이다.

그리고 국내곡으로 비의 나그네, 비와 외로움, 빗속을 둘이서, 그리고 박혜경의 Rain까지.


학창 시절엔 비를 많이 맞은 기억이 있다.

우산이 없어서 맞기도 했고 친구랑 장난 삼아 하굣길에 속옷이 흠뻑 젖도록 비를 맞으며 걸은 적도 있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만 골라 첨벙 거리며 걷기도 하면서.

집에 도착해서 비 맞고 왔다고 어머니한테 신나게 혼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유 없이 무작정 비를 맞았다.


그랬다. 비는 나의 슬픈 마음도 비뚤어진 자만심도 씻어 주었던 것 같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같은 감정 정화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다. 내리는 비를 보며 울어 본 적 있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간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날에는 항상 비가 내린다.

그 비는 이별의 슬픔을 씻어주고 보듬어 주는 위안의 비였을 것이다.


이 비가 그동안 메말랐던 대지와 산야도 적셔주고 선거 후

반목과 갈등으로 힘든 이들의 가슴도 적셔주는 단비가 되기를 빌어 본다. 그리고 화마로 살아갈 힘을 잃은 이들에게 치유와 위로를 주고 새로운 재기의 동력이 되어 줄 단비가 되어 주리라.


오늘 봄비 내리는 들녘에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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