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대추씨

by 김밍키

간달에 시드니행 항공권을 결제하면서, 나의 호주 여행은 시작되었다. 미리 정보를 검색하고 계획하는 데 늘 서툰 내가, 첫 홀로 장거리 비행이라는 도전을 ‘허영청에 단자 걸기’ 식으로 감행한 셈이었다.


받아놓은 날짜는 금세 다가왔다. 항공권을 예매하며 설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출국일이 되어 있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는 자칫 국제 미아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공항까지 마중 나와주겠다는 친구에게 모든 걸 기대보기로 했다.


남편과 친구는 미리 메시지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우리 민경이 잘 챙겨줘. 가자는 곳 잘 따라다닐 거야.”

“그래, 내가 잘 보살필게. 혹시 김민경 꿀팁 같은 거 없어? 여행 중 참고하게.”

“라테가 맛있고 예쁜 카페를 좋아해. 현지 음식은 다 잘 먹고, 적당한 산책도 좋아하지. 근데 생각보다 체력 약할 수 있으니까 주의. 아, 그리고… 정보 검색 능력은 최하위야.”

“오케이, 마지막이 제일 중요해 보이네.”


남편이 캡처해 보여준 그 대화를 나도 모르게 정차니 바라보았다. 보호자가 남편에서 친구로 옮겨간 듯했다. 나는 이제, 친구에게 전관되었다.


그렇게 친구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나는,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 친구도 브리즈번에서 시드니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었다. 나처럼 11시간의 장거리 비행은 아니었지만, 분명 휴가를 내고 놀러 온 여행객이었다.


너무 거적먹기인 걸 알면서도, 친구가 모든 소통을 도맡고 동선을 파악하며 나를 챙겨주는 동안, 나는 좀처럼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매일 약 2만 보씩 걸으며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도 꽤 벅찼다. 배터리가 닳은 게 티가 나면, 친구는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멈추고, 기다려준다. 실은 그게 더 겸연쩍었다.


친구는 내가 먼저 말하기 전까진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은 줄이고, 그 자리를 행동으로 채웠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나에게 먼저 물었고, 내가 몰라서 머뭇거리면 “괜찮아, 내가 알아볼게” 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친구의 방식은, 무뚝뚝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다정했다.


MBTI로 따지자면, T 같기도 하고 F 같기도 했다. P 같기도 하고, J 같기도 했다. 검사를 하면 정말로 거의 반반씩 나온다고 한다. 그녀의 극단적으로 배려 깊은 태도가 도리어 감정을 읽기 어렵다고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무색무취의 인간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색을 지워낸 듯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



시드니 대학교 고딕 양식의 건물 안쪽, 액자처럼 틀어진 창가에 친구가 앉았다. 니은 자로 몸을 접어 다리를 쭉 뻗은 채. 검정 양말에 운동화, 체크무늬 치마, 무릎 위로 단정히 올려놓은 가방. 벌써 서른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지만 가만히 웃고 있는 얼굴과 정돈된 자세는 풍경과 꼭 어울렸다. "시드니대 학생 같은데?"라고 웃으며 한 이야기는 참으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친구는 키가 150 초반이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더 작아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친구가 꼭 대추씨 같다고 생각했다. 작지만 단단하고, 속은 단맛으로 가득 찬— 모든 걸 감싸 안는 대신 꼭 필요한 것만 품고 있는 사람.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20대 중반,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다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결국 브리즈번에 눌러앉았다. 그런 공백이 있었기에, 오랜 친구치고는 같이 어디 멀리 떠나본 적도, 밤을 함께 지새운 적도 없었다.

그동안의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공백이 만든 친구의 모습은, 생각보다 생경했다. 친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브리즈번에 정착한 뒤에도 한동안은 한국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못했다고. 괜히 그들이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입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는 어떤 시간을 지나온 걸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하게 가슴이 찔렸다. 나도 그렇고, 한국인들은 흥야항야 참견하길 좋아한다. 마음속으로 사람을 자주 평가한다. 늘 판단하고 서열을 매긴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얼마나 조심하며 말을 골랐을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였을지.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친구의 말투에, 눈빛에, 몸짓에 남아 있는 듯했다.


어쩌면 친구는 외국이라는 날씨 속에서 자기만의 계절을 견디며 그렇게 자라온 사람 같았다.

시드니 대학교 고즈넉한 안뜰, 액자 같은 창가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더 굳히게 되었다.

작은 키에 조용히 웃고 있는 그녀는, 그날 따라 유난히 단단해 보였다. 마치 대추씨처럼.


한국은 초여름의 기운이 완연했지만, 시드니는 쌀쌀한 가을 날씨였다.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도시에서, 나는 나보다 한 계절 먼저 어른이 된 친구를 다시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야, 아주 늦은 제철을 맞이한 걸까. 서로 다른 기후를 지나, 제 속도로 자란 마음들이 하버브리지를 건너며 조용히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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